[묵상글]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전봉석 2017. 5. 24. 07:38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잠언 24:26, 29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8

 

 

 

모자를 꾹, 눌러쓴 여자가 내게 인사를 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있어서 나는 선뜻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스쳐지나가다, 아래층 아이엄마인 것을 알았다. 얼굴이 붉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설마, 술을 먹었나? 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도로 병원에 입원할 것이라더니 어떻게 됐나? 아이를 떠나보내고 어찌 사나? 이런저런 생각이 한참씩 머물다 흐려졌다.

 

예전에 읽은 어느 책에서 스캇 펙이 말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죄에 대한 것이다.’ 모든 상황과 사건이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죄와 무관한 고통은 없다. 설령 그것이 몸의 통증이라 해도 평소 나의 게으름이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복이 많다고 여기는 건, 주께 용서를 구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이다. 저 여인의 고착된 우울함은 어쨌든 사람들로부터 동조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다. 약을 의지하거나, 상담사를 찾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끔찍이 자기애로 사로잡히거나….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게 죄라고 한다면 종종 이를 잊고 있다가도 고통이 주는 신호에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주는 악을 대적하신다. 나는 이 땅에서의 즐거움도 혹은 고통도 모두 지나가는 것이라는 데 안도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글쎄. 자칫 과장된 언급이 될까 싶어 조심스러운데, 어디가 자주 아프다 보면 죽음을 자주 곁에 두기 마련이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서부터 이럴 바엔 얼른 죽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거짓 희망에까지 말이다. 그래서인가? 오후께 우연히 영국의 칼럼리스트 앨래나 프랜시스가 말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11가지 성경구절’을 메모해보았다. 앞서 나는 바울 사도의 ‘우리가 주목하는 것’에 대하여 참 지혜란 그런 것이겠구나, 생각하였다. 우리는 오늘을 주목하는 게 아니라 장차 누리게 될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성경뿐이다. 나는 점심께 아래층 아이엄마와 마주치곤 ‘죽지 못해 사는’ 저이의 구구함에 대하여 안쓰러워하다 그리 관심이 기운 거였다. 영국에는 <죽음 알림 주간>이 있는가 보다. 죽기 전의 마지막 소원과 장례 계획을 서로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취지의 기간인가 보다. 내가 직접적으로 아이엄마와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가끔 안부를 물을 때 그 앵앵거리는 목소리에서 마지못해 사는 이의 고달픔을 느끼곤 하였다.

 

다음은 메모해둔 11구절의 성경에 대한 나의 이해를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먼저 우리에겐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는 다음 말씀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잠시 머무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이는 결국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사랑의 목적이고 결과다. 잠언은 이를 공의로 정의하였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 12:28).”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건 세상이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이 구절의 말씀을 묵상할 때면 장애가 있다거나 가난하다거나, 삶의 고통이 축복인 게 더욱 뚜렷해진다. 왜냐하면 크게 이 땅에서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곧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은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병든 자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기를 쓰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데서 불안과 두려움은 교묘하게 회피구역을 설정한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이는 굳이 공의로운 재판을 기다리지 않는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도무지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안 들어올 때야 어쩌겠나?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 57:2).” 그래서 영면에 든다는 말은 한껏 어리석은 말이다. 영원히 잠드는 게 아니라 이제 본격적으로 깨어있는 게 된다.

 

이를 알 때 바울 사도의 증언이 신빙성을 더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때론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데 얼마나 큰 위로가 있는지 모른다. 내가 주의 것이면 이 모든 걸 주께서 책임지실 것이라는 데서 말이다. 그러므로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1-2).”

 

잘 사는 데 주안점을 두는 이보다 잘 죽는 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는 이가 지혜롭다.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산 자가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곧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이런 확신을 가진 이라면, 내가 어떻게 알아서 갚아주겠다는 식으로 세상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보면 왜 그처럼 생이 고약한가 했더니, 보란 듯이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아래층 아이엄마와 스치듯 비껴지나간 뒤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다. 한심하고 처량하고 때론 안 됐고 불쌍해서 혀를 끌끌 찰 일이지만, 저에게 주의 사랑이 전하여질 수만 있다면….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오늘 잠언의 말씀을 그리 읽어냈다. 어떤 서운함이 앞서다가도,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다시 저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더하시는 거였다.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다가도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8).” 기다림으로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라는 데 우리의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거였다. 중2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자기소개서를 설명하다 나는 확신하였다. 이를 열 번 백 번 고쳐 쓰고 다시 쓰다보면 우리 생에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안이함으로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어떤 일이 닥쳐서는 이를 내가 어찌 해결하려드느라 주를 바랄 기회를 또 놓친다.

 

문득 죽을병에 들었다 살아난 내 친구의 오늘을 그래서 안타까워하였다. 차라리 저가 그대로 장애라도 입었으면 좋았을 걸, 낫기를 바랄 땐 교회도 가고 성경도 보고 기도도 부탁하더니… 더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에 보다 더 완고해졌다. 이와 같은 영적 게으름에 대하여,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24:33-34).” 그러니 어찌할까?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16).”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시 35: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