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1-12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시편 116:8
몸을 건사하는 일도 사명이다.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고난이도의 주의 뜻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어떤 일, 무엇에 대해 염려가 근심이 또 불안과 걱정이 몰려들지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이에 오늘 시편의 말씀은 내게 유익을 더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 116:8).” 주의 구속이 나의 체험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어찌 설명을 해야 할까?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종종 난해한 대목이 이것이다. 나는 그 맛을 알겠는데 그 맛이 어째서 그 맛을 가지는지 말로다 전해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김엄지의 <돼지우리>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아이는 오전 일찍 아홉 시에 왔다. 오후 한 시에는 다시 학교로 올라가야 해서 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그러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본 것도 믿기 어려운데 보지 못한 것을 어찌 믿으라고 들이밀 수 있을까?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받아야 한다.
내 영혼을 건지시고, 눈에 눈물에서,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다는 걸 증거할 수 있는 게 삶이었다. 그러저러해도 이내 주를 의지하며 주 앞에서 사는 모습이 본이 되어야 할 거였다. 별 수 없는 일에 있어, 그것으로 연연해하지 않으며 무던함으로. 주어진 삶에 감사가 또 용서로 드러남으로. 문득 나는 어떠한가, 생각하였다. 내가 자존심을 세우느라 주가 욕을 당하게 하지는 않는지. 나의 신념과 확신을 주장하느라 교회가 난처한 지경에 놓이게 하지는 않는지. 나의 이익을 도모하느라 하나님을 인색하신 분으로 알게 하지는 않는지.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게 신앙이다. 막연한 외침이 아니다. 성경이 성경으로 있을 때 무슨 소용이람? 그것이 말씀으로 내 삶에 관여하실 때 나는 어려워지고 또 난처함에 놓이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구나, 하는 데서 절망감으로 또 좌절로 나를 엄습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느 문장, 어떤 표현 하나를 두고 그 의미와 이치를 따지느라 정작 그 말씀이 이루고자 하는 걸 못 보는 것 같아서 드는 생각이었다. 도올 김용옥의 강의를 들으면서 잠이 들곤 한다나? 나는 저가 아는 지식이 저를 삼켰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부류가 생겨나는 게 사실이다. 차라리 모르면 모를까, 안다고 하는 데서 그 앎으로 무장하느라 정작 자신이 모르는 걸 모른다는 사실이다. 누군 더욱 원어에 충실해야 한다고 해서 성경을 영어로, 라틴어로,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읽고 분석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러느라 단어를 연구하고 그때 그 시절의 풍토와 문화와 가치를 살피느라 분주하다. 내가 아는 곁의 누구도 그런 류의 자세를 고집한다. 말씀을 말씀으로 받지 못하고 토씨 하나, 그 본뜻을 구사하느라 얼마나 그 수고가 가상한지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할 건 아니지만, 병중에 가장 끔찍한 난치병은 ‘아는 게 병’이다.
당시에도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고 여기던 자들이 정작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과 늘 곁에서 함께 동고동락하고 회계를 맡아하던 가룟인 유다가 그러하다. 베드로는 자신의 앎으로 나섰다가 사탄이라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한동안 나도 도올의 해박한 지식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나는 이어령의 감수성을 사랑한 적도 있다. ‘저의 영성’을 사모하기까지 했었다.
어느 순간, 우리가 아는 게 내가 아는 것으로 그칠 때 그 앎이 가장 무서운 적이 되는 것을 알았다. 성경에서 가장 자부하고 행복했던 인물은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저들의 감사가 얼마나 행복에 겨워 보이는지 모른다.
그런데 주님의 감사는 다른 데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10:21).” 뭔가 등골이 오싹하지 않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 16:6).” 누룩 같다. 삽시간에 전파가 된다. 사람의 허영과 신에 대한 갈망이 섞이면 걷잡을 수 없는 산불 같다.
바울의 앎이 바울에게 어땠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이 차이를 아이에게 설명해주고 싶었다.
나의 생활이 또 생각이 그 자체로 주의 향기가 드러나기를 위해 기도한다. 뭘 더하고 빼고, 수를 써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였으면 하고 말이다. 그러기엔 나의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일까?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나의 한 날은 어제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그래서 드는 환멸이 또 민망함이 주께 송구할 따름인데, 오늘 잠언은 이와 같은 미련함보다 더한 게 있다는 걸 알게 하신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6:12).”
미련한 자는 여름에 눈이 오고, 추수 때 비가 오는 것처럼 그 영예가 적당하지 못하다. 저는 어리석은 대답을 일삼음으로 그냥 막대기로 등짝을 후려치는 게 제격이다. 말로 해봐야 소용없다. 그러니 그냥 저의 수준에 맞게 어리석게 대답하는 게 상책이다. 저에게 무얼 바라고 기별하는 것은 차라리 자기 발을 베어버림과 같다. 저가 아는 잠언은 저는 자의 다리 같이 힘이 없다.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 저가 떠드는 건 마치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 같이 위태롭다. 곧 미련한 자는 쓸모가 없다. 한데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보다 차라리 이런 미련한 자에게 희망이 있다!
누구를 겨누고 생각하던 말들이 나를 향한 것이 됐다. 그게 내가 아닐까? 아이가 돌아가고 나의 변변치 못한 말들과 너무 얄팍한 지식에 두려움을 느꼈다. 뭐라 누구에게 일러 가르친다는 일은 사뭇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시 87:7).” 곧 나의 모든 근원은 주님이시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2).” 그러므로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5).” 여기저기서 자기가 옳다 하나,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신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6).” 누가 나를, 심지어 내가 나를 세울 수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게 똥 같아도 좋다. 나를 지탱하였던 확신과 신념과 모든 아집이 쓰레기로 버려져도 마땅하다. 오직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저들이 맞다고 하면 저들이 맞다고 하자. 그게 옳다고 하면 그게 옳다고 하자.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그러나 나의 모든 근원은 주께 있다.
무던히 주만 바라며 살게 하소서.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회복시키신다. 영생은 하나님이 주신 어떤 선물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거기에 라틴어로 뜻을 알고 더 헤집어서 히브리어면 어떻고 헬라어면 어떠한가? 그런들, 그 삶이 증명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나는 체험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8).” 고로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0) | 2017.05.28 |
---|---|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0) | 2017.05.27 |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0) | 2017.05.25 |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0) | 2017.05.24 |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0) | 2017.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