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전봉석 2017. 5. 27. 07:36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잠언 27:25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1-2

 

 

 

죄에 대해, 우리 안의 양심이 가동되면 선택은 두 길뿐이다. 하나는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고, 하나는 주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다. 정죄함으로 목숨을 끊거나 회개함으로 주의 용서를 바라거나, 끝까지 자신이 해결하려들거나 이내 주의 도우심을 바라거나…. 오죽하니 그랬을까만 또 누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리에 안타까움이 컸다. 그 상황에서 저가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는 이였으면 어땠을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우리에게는 무찔러야 할 것이 있다.

 

여느 금요일과 같이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고 오후께 초등부 아이들 수업을 하였다. 그리고 수영을 다시 시작하였다. 설교문을 작성할 때, 건강을 돌보는 일도 사역이라는 생각이 새삼 강하게 들어서였다. 시간을 관리하고 물질을 다스리며 이웃을 벗하고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삶으로의 빛이 되고 소금이 돼야 하는 일이 말이다. 뭔가 거창하고 호전적인 무엇이 아니라 실제의 나날이 곧 사명 아닌 게 없었다.

 

사명이란 맡겨진 임무다. 뭔가 거기서는 되는데 여기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어긋났다. 기독교의 두 축을 이루는 게 ‘계시와 체험’이라고 한다면, 계시는 주의 것이고 체험은 나의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계시고 나의 십자가는 체험이다. 삶 가운데 나날의 그 소소한 모든 게 나로 하여금 주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며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딸애와 열띤(?) 토론을 할 때 나는 더욱 확신하였다. 경험하고 준비하기 위해 친구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을 했으면 한다는 말에 말이 길어졌다.

 

먼저는 주의 일에 경험으로 혹은 준비하는 차원에서의 사명이란 없다. 모든 게 최전방의 실전인 것이다. 두 번째는 여기서 안 되는 거면 거기서도 안 된다. 거기서는 될 거 같은 일이면 여기서도 실천해야 한다. 실천은 구호가 아니라 행동이다. 세 번째는 주를 향한, 주만 바라는 삶으로의 사명을 과제였다. 목사는 목사만 해야 한다. 나는 이를 성경에서 확신을 갖는다. 목사면서 사업도 하고, 택시 운전을 하면서 목사도 한다는 데에 이의를 갖는 것이다. 사업가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충실하면 될 일이다. 운전사로서 성심을 다해 주를 바라고 구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된다.

 

세 번째 것이 아이의 생각과 달라 설왕설래가 오갔다. 요즘은 어떤데, 하고 시작되는 아이의 항변에 모두 동의한다. 사는 게 팍팍하니까 ‘그럴 수 있다’는 논리에도 동의하였다. 누구도 그렇고, 뭐가 어쩌고 하면서 예를 드는 인물들의 생활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럴 수 있다’는 게 ‘그래도 된다’는 식으로 둔갑해서는 안 된다. 그건 아빠 생각이지! 할 때 나는 그게 성경의 이치고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저들도 각자 하나님의 관계 가운데서 그리 판단하고 실천하는 거 아니겠나? 하고 딸애는 따지고 들었다.

 

나는 저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많은 다수의 누구를 판단하거나 그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게 아니었다. 나는 고집을 부리듯 ‘목사는 목사여야 한다.’고 했다. 바울도 천막 치는 일을 하지 않았나? 할 때 그건 개인적으로 주 앞에서 양심껏 바라볼 문제다. 그래서 목사를 하면서 가게를 하고, 무슨 일을 겸하여 한다고 할 때, 과연 ‘바울도 그랬다.’ 하고 말할 수 있을까? 저의 천막 치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 대등하게 놓이지 않는다. 삶의 한 축이 아니다. 이는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남에게 부담을 줄까 하여 놓지 않은 일이다.

 

다른 일에 의미를 두고 그 가운데서 주의 사명을 다한다는 소리에 대해서는, 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 엄밀하게는 돈 때문이고, 돈 때문에 안 믿는 사람을 상대하며 ‘목사의 직분’을 내려놓고 말품, 발품을 파는 게 아닌가? 그래 모르겠다. ‘그럴 수 있지!’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가서 대리운전이라도 하시라, 그 좋은 학벌에 신체 건강한 사람이 왜 가만히 그러고 있나! 하면서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형제에게 다그쳤다. 그러던 사람이 ‘목사는 목사다.’ 하는 논조로 주의 뜻을 운운하려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주의 일을 운운하면서 우린 얼마나 몰염치하게 주를 외면하고 사는지 모른다. 옆 사무실 사람이 나에게 다단계를 권하면서 왜 그 좋은 걸, 목사로서 하면 더 잘 될 것 같은데 왜 거절하시냐, 하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단적으로 그런 것이다. 친구는 평신도 선교를 나가보니까 목사가 아니어서 제약이 많이 따르더라 하는 이유로 뒤늦게 신대원을 지원한다고 하였다. 뭐라 한들, 그래 맞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게 사명이라면 그리할 수밖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2-13).” 내가 뭐라 할 게 아닌 다음에는 입을 다물자. 다만 그게 나니까, 너니까, 그래서 주 앞에 부대끼는 일이면 치열하게 주의 뜻을 바라고 구하여야 한다. 그러다 시간 다 간다는 말에 그래도 된다고 응수하였다. 뭘 꼭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궁색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내가 좀 도와드리는 역할로 사명을 이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덕분에 가정예배가 길어졌다. 아이에게 그런저런 마음을 두시는 덴, 나에게도 마음에 준비를 하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잠 27:25).” 하는 말씀이 마음을 둥, 하고 울린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내가 임의로 할 수 없다. 더욱이 주의 일을 두고 운운하는 것이라면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 생각이 정말 주의 마음인지, 단지 내 아집과 교만에 의한 자기합리는 아닌지, 베고 또 베야 한다.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라.’ 가꾸고 다듬는 일은 내게 주신 일이다. 때가 되면 나가야 하고 내보내야 할 일에 대하여 나의 욕심을 차릴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단련하신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21).” 그래서 ‘잘한다, 잘한다, 자란다.’ 어쩌면 아이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내 품에서 내어놓아야 할 거였다.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는가 보자! 나는 아이에게 말하였다.

 

목사로 산 게 얼마 안 되는 세월이었지만, 목사가 목사로 살 때 하나님이 다 하신다. 아무래도 형편이 어째서, 현실이 어떠니까, 하는 동안에는 고스란히 자기 수고를 짊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목사를 누릴 겨를이 없는 것이다. 목사가 뭔데? 하고 아이가 묻자, 나는 과감하게 말했다. 말씀만 붙드는 사람. 그것으로 꼴을 삼아 말씀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 저의 말품은 말씀에서 오고, 저의 발품도 말씀으로 인함이다.

 

요리사는 평생 주방에서 칼을 들고 식재료와 씨름하고, 미장이는 시멘트를 바르는 일에 전념하여 장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목사는 말씀만으로 승부한다. 목회니 목양이니 하는 품삯은 다른 이가 해도 된다. 집사도 있고 권사도 있고 장로도 있다. 여러 직분이 있으나 ‘예언하는 일’에 있어서는 목사의 고유 직책이다. 나는 그리 배웠고 그리 알고 있다. 하다못해 어느 분야에 종사한다고 할 때도 한 길만 파는 셈인데 하물며….

 

아니면 ‘목사’ 떼고, 그러저러한 사역을 감당하면 될 일이다. 운전에 충실하든, 장사에 능통하든, 맡기신 그 사명을 다하면 될 일이다. 시대가 그렇지 않다, 다들 요즘은 이렇게 저렇게 한다, 왜 당신만 그런 고집을 부리느냐, 하고 따진다면 더는 뭐라 할 게 없다. 싸우자고 드는 게 아니라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리 말할 것이고, 그게 내가 보는 말씀에 의한 거였다. 행여 여느 직업에 대해 폄훼하는 소리가 아니다.

 

최소한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 시대가 어떻고 사람들이 어떻고 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서야 쓰겠나? 그건 또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씨름해서 얻은 것이겠거니! 옳고 그름을 내가 운운할 게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러므로 나의 어리석음을 잘 안다면 주를 바랄 수밖에. 주님으로 죽자. 말씀으로 죽자. 이제 와 생각해보면 어떻게 나의 부모는 그 어려운 시절을 ‘목사’로 살면서 4남매를 이처럼 길러냈을까 싶은데, 말 그대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였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면 거둬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한참 뒤에나 깨닫게 된 이와 같은 진리를 나는 사랑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주를 바란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1).” 오늘 잠언의 말씀은 일관되게 나를 주 앞에 세우고 있다. 오늘 일로 족한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이와 같은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도 벅찬 삶이 ‘목사’다. 다들 저마다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맡기신 바 그 생을 다하는 게 충성이었다. 목회니 목양이니, 선교니 봉사니 하면서 자꾸 주의력을 흩어서는 안 된다. 다 그 자리에서 맡은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계시를 받은 자’로 사는 데 따른 체험은 축복이면서 사명이었다. 계시는 모두의 것이지만 체험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내게 이루어지는 체험은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가 구하는 모든 것을 주께서 행하시는 덴 바로 그 이유가 있었다. 내가 아이와 대화하면서 우리의 사명에 대하여, 그 주도권을 주께 맡기는 것에 대해 그처럼 강조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구하나 나의 구함은 주의 영광을 위한다. 목사의 제1 사명이겠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닌 것이다.

 

아,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이에 오늘 말씀은 그 길을 열어 보인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뭘 하든 그 이유였다. 직분을 운운할 게 아니었다. 그 사명을 다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