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전봉석 2017. 5. 28. 07:23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잠언 28:14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4

 

 

 

노인들 틈에 섞여 수영을 하였다. 굼뜨고 막무가내인 저들에게 막혀 여러 번 멈추어야 했다. 중간에 서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이도 있어, 가뜩이나 느려터진 나의 수영은 더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툴툴거리다 보니, 그러고 있는 게 나였다. 햇살은 따가웠고 바람은 매서웠다. 자전거를 타고 조금 먼 길을 돌아서 왔다. 어디 멀리 유배지에 와 있는 사람처럼 한적하였고 우울하였다. 토요일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아이들은 글방에 오지 않았다.

 

왜 이처럼 마음이 스산한가? 했더니 전날에 딸애와 나눈 대화 때문인 것 같았다. 놓아줘야 하고 내어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은 쓸쓸하게 하는 거였다. 가만히 십자가를 바라보고 앉아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여기는 어딘가? 싶은 어떤 서러움 같기도 하고, 나는 몸서리치듯 청소기를 돌리고 저 밖에 복도까지 물걸레질을 하였다. 그리고 소파에 올려두었던 오스왈드 챔버스의 <십자가의 구속>을 펼쳐 읽었다.

 

꽤 오랜만에 친구는 페이스북을 통해 안부를 전해왔다. 목회는 어떤지, 물어 나야 늘 똑같다는 소리를 해주었다. 감사하다는 말에 기도를 부탁하였다. 늘 똑같다는 말이 새삼 감사하게 다가왔다. 내 안에 이고 지고 가는 마음에 대하여는, 별 수 없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오늘 잠언의 말씀도 나를 일깨우신다. 마음은 믿을 게 못 된다. 보채는 아이 같다가도 객쩍은 농담으로 즐거워한다. 마음에 연연하지 않으려면 주를 경외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이길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곧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14).” 당연하여서 때로는 무시되는 경향도 있다. 주를 경외한다는 건 무얼까? 주신 날을 묵묵함으로 살아서 주를 바라고 구하는 마음으로 사는 일이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24).” 바람이 불고 햇살은 작렬하지만, 어떤 보람도 없고 희망도 없는 듯 그게 그거인 것 같은 날이지만, 이 날은 주께서 정하신 날이다.

 

어떻게 지내나? 하고 물을 때, 늘 똑같지 뭐! 하고 대답해도, 참 감사하다는 대답이 돌아온 것에 기도를 부탁할 수 있다는 게 복이었다.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가 계심이다. 저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이로써 내가 오늘 거침없이 주 앞에 나올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나의 고민을 불평을 두려움을 서러움을 툴툴거리듯 토로할 수 있는 거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남들에게 말한들, 어떤 위로를 찾아 배회한들, 일에 보람을 찾고 자기 수고에 만족한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아뢸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두시는 그 기쁨은 환경과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생겨나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그럴 수 있게 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저의 십자가로 나의 십자가는 가벼워진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이를 어떻게 이해할까? 전에는 그처럼 자아실현을 위해 사람을 만나고 일을 찾고 공부를 하고 나름 애쓰고 수고한다고 하면서 그 안에 안식이 없었다. 돌아보면 손에 쥔 것은 모래처럼 허망하였다. 좋다던 사람은 떠나갔고 뭔가 좀 이문을 남겼다 싶은 건 기름을 움킨 것 같이 되었다. 그래서 더 억척을 떨고 악착스럽고 산다고 사는 날들이 고역이었는데, 우리나라가 EU 국가들보다 자살률이 2.5배나 높다는 발표에 그도 그렇겠다, 생각하였다.

 

귀신이 난무하고 다음 생을 운운하며 자신이 뭐로 태어날 것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굳이 애써서 참고 또 견딜 이유가 없다. 오죽하니 그랬을까 싶다가도 그만만 못한 인생이 또 어디 있겠나, 싶은 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럴 수 있는 게 성령이 내 안에 계심으로 가능한 일이다. 주의 영을 내 안에 모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슨 힘으로 버티며 살까? 흩어져 사라지거나 완고하게 굳어져 자기 아집으로 변한 믿음뿐이라.

 

(친구 이야기를 쭉, 쓰다 지웠다.) 누굴 뭐라 할 거 없다. 내 안에 두시는 생각과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어떤 답답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럼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시 118:21).” 주는 나의 응답이 되셨고, 구원이 되셨다. 이런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도는 가증할 뿐이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그러므로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가장 우선이 무엇인가를 늘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 두시면 그리 두시는 대로, 오늘, 이 날을 주가 정하신 데 따른 무던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럼 요한복음 17장을 읽을 수 있다. 주께서 내 생을 통해 지금 무슨 일을 이루어가고 계시는지를 말이다. 주님의 기도 안에 내 이야기가 있다.

 

먼저는 영생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 나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가지셨던 영화를 비워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이가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 이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

 

나로 말씀 앞에 앉게 하심을,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 믿음으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성령을 내 안에 두심으로 나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신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6).”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나를 혼자 두시기까지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 진리로 나를 채우시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 이는 곧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

 

예수님의 기도 응답이 오늘의 나였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 아멘. 그러므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 118:25).” 아멘.

 

이처럼 말씀을 가져다 놓기만 해도, 소리 내어 읽기만 해도, 그것이 내 말이 되고 나의 기도가 되게 하심을 감사한다. 친구가 참 감사하다고 한 말의 의미를 나를 그렇게 읽기로 했다. 세상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는 도대체 알 수 없는 감사다. 당최 감사할 게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내 안에 이는 감사를 나는 주체할 수 없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6).”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아멘.

 

나는 아이들을 생각한다. 누구를 떠올리고, 어떤 염려와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사람이 어찌할까! 주는 내 편이시라.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신다. 주께서 날 위해 기도하신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이 날은 주의 것이라.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