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전봉석 2017. 5. 29. 07:13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잠언 29:9, 11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시편 119:49

 

 

 

금이나 은보다 주의 성령을 구하기를 바랐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그러라고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 값은 이미 지불되었다.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성령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한 번 해봐라. 나는 아이들에게 간절히 권하였다.

 

아니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안 오고 못 오는 아이들에 대하여는 기도밖에 다른 수가 없었고, 기껏 온다고 나온 우리들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였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아이들의 밍밍하고 데면데면한 태도에 대해, 우리는 서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본인도 멋쩍을 뿐이고 바라는 나도 애가 탈 뿐이었다.

 

모처럼 아이가 왔는데도, 혹은 서로가 같이 앉아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나누는데도, 소 닭 보듯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데야…. 그래서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기진하였다. 얘랑은 탁구를 치고, 쟤랑은 안부를 묻고, 이 말을 이끌고 저 말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니 자기들도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굴다 휑하니 돌아가기 일쑤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은 다른 그 무엇보다 성령을 구하자. 기도할 때마다 성령을 내 마음에 주세요, 성령을 나에게 부어주세요, 하고 바라자. 그래보자. 그러자. 당부하였다. 그리곤 혼자 남겨져서는 소파에 누워 입을 삐쭉거렸다. 금세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내 안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내 안의 두 자아는 어느 쪽이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었다. 죽자고 덤비는 어리석음은 어제와 같은 꼬투리를 잡고, 다 지난 감정을 들추어대며 사람을 들들 볶는다. 이에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잠 29:9, 11).”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에 대한 서글픔으로 옮겨오다니!

 

나는 주께 아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시 119:49).” 그리하여 오늘에까지 나를 인도하신 이가 또한 남은 나의 모든 날들도 책임져주실 것을. 오늘에까지 함께 하게 하신 우리 아이들에게도 주의 은혜와 은총을 쉼 없이 부어주시기를. 내게 말씀을 주셨고, 내게 소망을 주신 이가 책임지고 붙들어주실 것을. 돌아누워 마치 토라진 아이처럼 굴다 툴툴 털고 일어났다. 마음은 참, 언제나 어리석어 응석만 부리는 꼴이다.

 

이때 내가 주의할 게 있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9:20).” 행여나 말이 앞서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주님 앞에서나 이리 투덜거릴 따름이지, 누굴 함부로 판단하고 속단하여 비난하지 않기를. 오히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같이 어디 선교도 좀 가고, 운동도 하고, 뭔가 청년의 때에 재미난 일을 좀 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는.

 

그러니 참 신기한 게 감사 뒤에 원망이 온다. 기도 뒤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아이들의 건강한 영혼을 두고 아뢰다 순간 나는 따귀 맞은 영혼처럼 입을 삐쭉거리곤 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기를. 나를 주관하시고 다스려 주시기를. 오직 나는 주님만 바람으로 나의 마음이 평안하기를.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23).” 아! 왜 교만이 올까? 정작은 두려움 때문이다. 스스로 무장하는 바가 교만이다. 내가 뭘? 하는 심정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25).” 그렇구나! 다른 더 수는 없는 것이구나. 나는 주를 의지하는 것밖에 달리 더 나은 무엇을 바라고 구하는 게 교만이었다. 사람을 두려워함으로 자꾸 올무에 걸리는 거였다. 왜 툴툴거리고 근심부터 하는가 싶었다.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야!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결국은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 29:26).” 주가 하신다. 나는 그저 말씀을 준비하여 말씀으로 먹일 뿐이다. 내게 다른 무엇도 없다. 뭔가 대단한 일 같지만, 달리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데서 안도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내가 무엇으로 저 아이들을 건사할까? 주의 말씀뿐이라. 곧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24).”

 

나의 즐거움, 나의 충고자이신 말씀을 나누어주고 되새겨 함께 충만할 수만 있다면! 만일 다른 더 나은 게 필요하다면 것도 주께서 하실 거였다. 한 녀석이 학교 무슨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나름 자부하는 것 같았다. 이상한 데 아니지? 하는 이상한 소리나 할 뿐, 나는 뭐라 더 이상 관여할 게 없었다. 저들과 같이 자취를 하고 새로 사귀게 된 자매도 거기서 만났다고 하니, 그저 주의 도우심이기를. 주께서 저를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나의 염려는 그저 노파심에 그치고, 그것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할 뿐.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27).” 온갖 이단과 물렁한 진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나는 다만 주의 기이하신 일들을 되뇌어 주님만 바라고 의지할 뿐이다. 때론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28).” 내가 무슨 수로 저들을 상대하고 싸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아이가 와 주는 것만으로도 기적과 같은 일인 것을. 다만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29).”

 

우리 교회가 또 나의 삶이 온전히 주만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를.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31).” 그러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 하여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 다른 그 무엇보다 이를 즐거워하리다. 곧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36).” 주를 빙자하여 아이들의 마음을 사는 데 주목하지 않게 하시고,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37).”

 

오늘 아침에는 시편의 내용이 모두 나의 기도였다.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38).” 내가 내 몸을 주께 드렸을 때, 그동안 내가 그토록 귀히 여겼던 것들이 썩어질 것임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하나하나 내게서 떨어져나가게 하시었다. 무엇보다 친구가 그러했고 죽자고 읽어대던 소설이 또 시가 그러했고, 나의 즐거움이 또 희망이 그러했다. 심지어는 더 이상 구원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헛된 헌신과 봉사도 그러했다. 주의 말씀으로 나를 세우셨다.

 

얼마나 친구를 바라고 구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읽고 싶은 책에 대한 열망은 돈이 없을 때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게 하였었다.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고 사랑을 희구하느라 그릇된 관계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돈을 위해 애썼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양심도 쓸모없이 구겨버렸다. 거짓에 거짓을 더해 어딘가에 소속되길 원했고 그 기관에서 인정받기 위해 저들의 온갖 더러움을 더럽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날마다 구원받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살았다.

 

그러했던 나를 돌아보면 오늘의 나는 기적이다. 내가 한 게 없었다. 막판에 더는 내 힘으로 버티기 어려울 때,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든 게 달라졌다. 곧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이게 뭔지, 지금의 나는 안다. 그러므로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말씀이었다.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므로 나는 말씀뿐이라. 내가 아이들에게 내어줄 게 그것밖에 없어서, 달리 더 좋은 걸 알지 못하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때론 아쉽고 안타깝고 미안하고 속상하다 해도, 그게 실은 교만이라는 데도 이의가 없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여전하여서 때론 휘청거리기 일쑤지만, 그러므로 나는 더욱 말씀뿐이다. 그것뿐이어서 그게 은총이었음을 감사할 것이다. 비록 아이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이 그저 밍밍하니, 얘가 대체 왜 오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지만, 말씀이 하실 것을 믿는다. 어디서는 젊은 날에 더 큰 비전을 위해 선교를, 어디서는 짜임새 있는 훈련과 양육을 통해 충성을, 어디서는 실제의 헌신을 봉사를 그리하여 이 사회에 이로운 이로 만든다 해도…. 나는 말씀뿐이다. 내가 아는 말씀이 전부든 아니든 내게 두시는 말씀으로, 굳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러므로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