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전봉석 2017. 6. 8. 07:53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전도서 8:7-8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나태는 정오의 마귀다.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이다.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6).” 이제 뭘 하지? 싶으면서도 끝내 아무 것도 하려들지 않는, 우울증보다 더 심각하다. 이를 주께서 치유하지 않으시면 허사라.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재 대신 기쁨의 기름을

슬픔을 대신하는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여 의의 나무를,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수업 시간이 다 돼 슬그머니 아이가 왔다. 해맑은 아이의 모습에 저절로 마음이 녹았다. 어른들이 참 염치가 없었다. 안 올 줄 알았고 더는 안 보내려니 하고 있어서였을까,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의 웃음이 아프게 느껴졌다. 서너 명의 아빠, 나이 많은 형, 누나 그리고 밤늦게 일을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엄마. 저 새벽 네 시에 일어났어요, 엄마가요… 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데 다른 아이들이 왔다. 엄마가 일 나가고 어렵게 열두 시에 잠들었는데, 어쩌다 네 시에 깼을까? 늘 술에 절어 있는 엄마.

 

아이들 수업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아내에게 보내주었다. 아이가 왔다는 걸 알려주려고 말이다. 우린 마음을 접고 포기했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신가보다. 열한 살 아이는 위경련을 자주 일으킨다. 눈치를 살피고 유난히 겁이 많다. 언제든 엄마에게서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조마조마하다.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 나는 형과 누나는 늘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다. 늘 과도하게 많은 돈을 카드에 넣고 다닌다. 눈치가 빠른 만큼 먹고 싶은 것도 많다. 퐁당퐁당 말이 앞서서 곁에 친구들에게 핀잔을 자주 듣는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다.

 

잘한다고 잘해봐야 더러 친해지면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이거 너 줄까? 내가 사줄까? 습관처럼 아이는 말한다. 목소리에 늘 울음이 섞여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같이 읽고, 평소 자신이 얼마나 인색한지, 구두쇠처럼 구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글로 써보게 하였다. 다들 그런 적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다 아차, 싶은 게 있었나보다. 아이는 할 말이 많다. 그래서 더 눈치를 본다. 해도 될 말과 해선 안 되는 말이 자주 뒤섞인다.

 

나태는 따귀 맞은 영혼의 시무룩함이다. 입을 삐쭉 내밀고 우물쭈물 할 말을 삼킨다. 가려던 길을 주저한다. 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 잊었다. 너무 피로하다. 영혼의 슬픔이 너무 무겁다. 제 몸에 재를 뿌리며 한탄한다. 근심이 근심을 누른다. 약한 심령이다. 아이는 옆에 아이가 준 과자를 몇 개 얻어먹고는 배가 아프다. 속엣 얘기를 마음껏 써보게-말해보게 하고 싶은데 혼자가 아니어서 주저한다. 너무 어린아이다. 자기 말의 무게에 눌릴 수 있다. 때로는 생각이 두려워서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서둘러 예약된 치과로 갔다. 잇몸치료를 하는데 생각보다 아팠다. 그런 와중에 아이 생각이 났다. 혼자만 있을 땐 주저리주저리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다른 아이들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뗀다. 그런데 새로 온 아이는 또 특이하다. 다 왔다가 똥을 누려고 집에 다녀왔다. 혼자 있을 땐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손발이 쭈글쭈글 해질 때까지 나오질 않는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 할아버지는 그냥 할아버지다.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지방에서 온다. 생모에 대한 기억은 없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잠 21:30).”


기분 나쁘게 입을 쩍, 벌리고 누워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들으며 아이 생각을 했다. 마취주사를 맞아서 입에 드나드는 둔탁한 소리가 생소했다. 지나치게 멋을 내는 아이. 엄마가 미장원을 한다고 했던가? 아이는 참 못생겼다. 야광 티셔츠를 입었는데 눈이 부셨다. 뭘 하면 늘 느리다. 미적미적 일부러 그런다. 그래서 뭐라 말을 거들고 대신해주면 그제서 좋아라한다. 벌써 화장을 짙게 하고, 모든 학용품이 공주스럽다.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아도 혼자 괜찮다. 느리게 또 천천히. 굳이 할 필요 없다는 듯.

 

‘슬픔’의 어원이 느껴질 만큼 ‘느리게’라는 데서 놀랐다. 라틴어로 ‘트리스티티가’ 곧 나태에서 왔다. 그래서 나태를 풀어서 쓰면 ‘슬픔에 빠지다’라고 한다. 실의, 슬픈 감정, 무관심, 낙담, 무감동, 의욕상실, 열정부족.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태를 ‘영적인 선한 얼굴의 슬픔’이라고 하였다. 나는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 끝났어요, 젊은 의사는 마스크를 쓴 목소리로 말했다. 목구멍 너머 슬픔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을 위해 그리하셨다. 지혜로도 명철로도 주를 당할 수 없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내가 먼저 아이들보다 앞서 살았다고 해서 저들의 슬픔을 다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주저하는 게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아닐까?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그러니 내가 안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닌지. 모르는 게 약이다. 내버려두자. 내 안의 속삭임이 설득력이 있다. 어차피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뿐,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전 8:7-8).”

 

오늘 아침엔 생각이 자꾸 겉돈다. 그 애가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을 더듬다보면 놀란다. 내가 왜 이 아이를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어릴 때, 나의 어린 것은 마치 그걸 알고 있다는 듯 마음이 또 몸이 저절로 기운다. 나도 그런 적이 있어! 하고 아이에게 접근하고 싶지 않다. 바람을 주장하며 바람을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주님, 하고 부르는 나의 호흡이 길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복도를 걷다 누가 마주오며 인사를 한 걸 외면한 꼴이 됐다. 버퍼링이 일 듯 나중에야 알았다. 오해했을 텐데.

 

나태를 헬라어로 접근하면 ‘오크네로스’ 곧 축소하다, 참여하기를 주저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자신의 나태를 주인의 인색함으로 해석했다. 그리 여겨야 자신은 놓여난다. 너 때문이야, 하는 속성이 다 그런 것이다. 억압된 슬픔을 설명할 길은 없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네가 악해서 내가 약하다.’ 하는 원망을 낳는다.

 

그래서 바울은 처방의 말씀을 건넸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주를 섬긴다는 게 때론 형이상학적인 것이어서 막연하다가도 우리가 이 아이를 생각하고 또 위하여 마음 쓰는 일에 있어 미루지 않는 것이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 아내는 아주 의외라는 듯 아이가 글방에 또 공부방에도 온다는 소리에 입을 삐쭉거렸다. 정말 미운 아이다. 아이가 아이라 아이엄마가 말이다. 염치가 없다. 마치 못되게 구는 사람 같다. 엿 먹어라 하는 것도 아니고, 어쩜 그러냐! 나도 속이 끓는데 아내는 오죽할까?

 

다섯 달 치 교육비가 밀렸다. 이제 아들애 등록금 값이다. 그래서 연락을 좀 했더니 미안하다며 아이를 그만 보내는 거였다. 뭐 이런…. 죄송하다고 하니 어쩌나. 아내는 내게 답 문자를 해달라고 했고, 나는 그 사정을 잘 안다. 형편 되는대로 하자. 아이는 보내시라. 같이 오는 애들이 다 친한데 상처 받을라. 힘내시라. 그리곤 며칠 또 감감무소식 아이도 안 보내서, 더는 어쩔 수 없는가보다 했던 거였다. 그러니 이런 걸 어찌 해결해야 하나? 때로는 억지스럽지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억지스럽다는 건 흔쾌히 우리 안에 어떤 기쁨이 또는 열심이 즐거움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어도 주님 보고 하자. 내내 아이 생각으로 측은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말이다. 우리는 늘 한계를 체험합니다. 할 수 없다는 기도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2-3).”

 

우리가 저 안 믿는 아이들을 위해, 그 가정을 위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다해 섬겨야 하는 이유였다. 나태가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 또한 언제라도 휩쓸려 또 화가 슬픔이 우리 영혼을 시무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슬픔을 견디는 세상에서, 자신의 비통함에 젖어 재를 뿌리는 아이들에게, 슬픔대신 찬송을. 우리의 근심대신 의의 나무를 심으실,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

 

슬픔대신 화관을/ 재대신 기쁨을/ 슬픔대신 찬송을/ 근심대신 의의 나무를/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 곧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