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전도서 9:4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편 128:2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화딱지가 나는 일이다. 뭐 이런! 확 때려 치고 싶은, 더는 상종도 하기 싫은… 그래서 그만두는 게 가장 상책일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런데도 계속 할래?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어떤 억울함 같은, 답답함이 신물처럼 올라왔다. 아,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살아서 산 것은 아직 살아서 그 가운데 소망이 있다.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읽었다. 아직 우리가 곁에 있어서, 하나님이 너로 나를 나로 너를 마주하게 하실 때가 귀하였다.
예전에는 어땠는데, 하는 따위의 회상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는 너와 나의 ‘우리’가 무너진 때를 생각하였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내는 말했다. 더는 누구에 대해 안타까움마저 생기지가 않아! 말끝마다 누구 이야기를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저 문득 잘 살겠지? 하고 마는 사람이 되었다는 데서 안타까워 하는 소리였다. 물론 어느 지점을 돌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돌이켜 또 새로운 ‘너와 나’를 구성하며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겠으나 ‘친밀한 우리’가 아닌 ‘친절한 우리’ 정도로 족할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저들을 위해 기도하던 걸 딸애가 제안을 하였다. 한두 명이라도 같이 그 사연을 나누고 그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며 기도하면 어떨까? 뭉뚱그려서 ‘아이들’을 기도하는 게 아니라 누구, 바로 ‘너’를 부르며 기도하자는 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에게 생겨난 새로운 마음 때문이었다. 전엔 알지 못하던 것으로, 나는 아이들 사진을 보면 가슴이 저리다. 주께서 우리에게 두시는 마음을 때론 주체할 길이 없다.
얘는 매일 밤마다 엄마가 술집엘 나가면서, 화장을 짙게 한 엄마는 어린 걸 앞세워 매일 늦은 밤이면 한 단지 건너 아이 이모네 집으로 데려간다. 집에는 나이 터울이 열 살 이상 나는 누나와 형이 있는데도, 무서워 보채는 아이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얘는 엄마가 두 오빠에게만 빠져 자신을 거의 방치한다고 생각한다. 얘는 엄마 얼굴을 모르고 다 자라서는 새삼 할머니를 엄마로 부른다. 얘는 신경성과민증세로 시달리고, 얘는 늘 두통을 호소한다. 얘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이다. 얘 아빠는 다른 살림을 차렸다.
우리는 얘 혹은 아이들로 불리던 걸 직접 그 아이를 호명하며 기도하자고 하였다. 그 아이가 왜 영악할 수밖에 없는지 또는 거짓말을 잘하는지, 화를 잘 내는지, 꾀를 부리는지… 전엔 그런 게 되바라진 거여서 몹쓸 것으로 여겼는데, 이젠 안 된 것이다. 주의 은총이 아니고는 그 긍휼하심이 없이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딸애가 말했다. 우리 선교단체도 보면 어쩜 이럴까, 싶을 정도로 온전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하나도 없어. 다들 참 너무하다 싶어. 새삼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느꼈어.
가정예배를 드리며 더욱이 날 위해 기도해달라고 말하였다. 내 안에 이는 회의와 또 무력감을 주께서 씻어주시기를. 대체 얘랑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게 진이 빠진 하루였다. 했던 말 또 하고, 무엇에 대해 변호하고, 이해를 구하고, 당부하고… 그러다 불쑥 아이가 돌아간 뒤 화딱지가 나는 것이다. 어떤 서글픔이 부유물처럼 올라오는 것이다. 왜 내가 얘에게 이러나 싶은 게, 다 하나님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말씀만 아니면, 주의 마음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혼자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이 꼴 저 꼴 안 보는 곳으로 말이다.
기껏 중2 아이가 와서는 뭐라 말을 해도 대꾸는 안 하는 것이다. 얼레고 달래며 아이스크림을 주랴, 이거 할까? 저거 할래? 말을 걸다 성질이 났다. 날 위해 오니? 하고 물었다가 또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여기서 이러면 더는 하지 말자는 소리가 된다. 쟤도 그게 안 되니까 저러는 게 아닌가? 일요일에 엄마가 쉬는 날이면 가지 말라고 그래서 교회에 못 오고, 일하러 나가는 날이면 엄마 없는 일요일 오전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 못 오고. 아이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걸, 아 주님!
그럼에도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아직 내 곁에 있어서 우리가 함께 가는 이 시간이 복되었다. 이미 지나간 사이가 있고 더는 어쩔 없는 사이도 있는 거여서,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리 나누었다. 곁에 두실 때 잘하자.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그게 내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인가?
7시쯤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순간 울어버리고 싶었다. 너무 싫어서 말이다. 아무런 성과도 없고, 그렇다고 뭔가 변화의 조짐도 없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제 주일에 교회 오는 것도 그만둘까 생각 중이에요, 하던 녀석이 이제 이 일도(성경공부하는)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하는 것이다. 욕지기가 아니 화딱지가 올라와 정말이지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누가 건들기만 하면 확,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 필요 없으니까 훌훌, 떠나버렸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리는 저리고 엉덩이는 뜨거웠다. 나는 다음 날 작성할 설교 원고 초안을 잡았다. 본문 주석을 펴서 인용된 성경구절을 메모하고 나뉜 대지를 읽었다. 이걸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은 어떤 답답함이 계속 물었다. 그래도 계속 할래?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도대체 이게 뭔 소린지 모르겠으나, 나는 성경을 붙든다. 아브라함이 이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노아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이 일을 계속해서 뭐하나 싶은, 언제까지 이 길을 가야 하나 싶은, 이 하나님을 정말 믿어도 되나 싶은…. 어찌 그런 날들이 없었겠는가. 몸이라도 건강하면 좋을 텐데, 나는 자꾸 허리가 아파서 몸을 비틀었다.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내게 두신 이 날들의 사람을, 환경을, 마음을 그리고 내 변변치 못한 몸을 주의 이름으로 마주하는 일. 우리 서로 주님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꼴딱꼴딱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 당장 지난 달 관리비에 월세에 또 닥쳐온 아이 등록금에 마치 엎친 데 덮친 것 같은 난감함뿐인데, 어떻게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겠나! 너무 염치없는 아이엄마의 경우는 그렇다 쳐도 아이가 그럼 좀 나아지는가 말이다. 더 영악하고 당돌하고 심지어 나를 무시하는 듯 함부로 구는 이 애를 어찌 사랑하나?
주님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할 수가 없다. 주님의 사랑으로가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이 애를 우리가 어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아내는 또 딸애는 어느 아이 이야기를 하다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러워했다. 안타까운 아이의 사연이 또 환경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문득 드는 생각이 아, 그런 기도가 가능한 것이구나!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스데반이 저들의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할 수 있었던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저 애가 또 그 부모가 자신들이 지금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거였다. 저가 영악한 게 또는 염치없음이 그도 어쩔 수 없는, 죄였다.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발악이다. 사악함이었다. 나는 계속 떠오르는 아이의 항변을 그 돼먹잖은 태도를 지워달라고 기도하였다. 내 안에 이는 실망과 좌절을 위로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것으로, 그 모멸감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누굴 탓할까? 아이를 나무란들, 따져 물어 혼을 내준들, 그런다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내가 그렇게 굴지 않았던가! 나는 통탄하였다. 그때 내가 악을 쓰던 게, 억지를 부리고 막무가내로 굴던 게, 그게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면 저 아이도 그런 것일 텐데…. 주님, 우리에게 주의 마음을 주세요. 주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린 미움과 증오로, 모멸감과 자괴감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그리 대했던 걸, 내 곁에 두셨던 믿음의 사람에게 그리 못되게 굴었던 걸 용서해주세요. 나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미칠 것 같아서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 아침, 눈물이 또 한숨이 앞을 가린다. 아이를 생각하면 미움과 서러움이, 안쓰러움과 시기가, 아니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이는 것 같다. 내가 왜 저런 것 때문에 진을 빼야 하나, 싶다가도 그게 결국은 나였음을.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전 9:5).”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사랑하게,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그런 거 보면 우리 가정이 참 복이 많다 싶어. 딸애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그것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 128:3-4).”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곧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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