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전도서 10:2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시편 129:3-4
같은 것 같으나 다르다.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만 서로는 바라보는 데가 같지 않다. 그런 거 보면 우리의 죄는 무지가 아니다. 모르지 않다. 알면서도 아는 데 마음을 기울이기 싫어한다. 그저 사는 데 따른, 일반인의 언어로 빚어지는 구구한 생활의 이야기로 족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왔고,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두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그저 그러려니… 일반인의 관심에서 우선이었다. 기도도 없었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데 따른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되었다. 마치 늘 그렇다는 듯.
몇 달 만에 누가 왔었고, 나는 저의 대화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런 거지 뭐. 조금 늦은 시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생각하였다. 그런 거다. 그러려니, 딱 그 정도 거리에서 ‘친절한 타인’ 정도의 반가움과 예의와 안부면 족한 것이다. 나는 요즘 우리 아이들이 어떤지, 교회는 어떻고, 너의 신앙은? 하나님은 안녕하신지. 물어보고 말하고 싶었는데 허사가 됐다. ‘우리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다.’ 안다고 여기는 자기의 앎이 그 정도에서 족한 거였다.
낮에 읽은 바울 사도의 내용이 생각났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그래 맞다. 모르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사는 데 따른, 남들처럼 소소한 것으로 수다가 되고 말았다. 모처럼 나누었으면 하던 내용은 일언반구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 거지 뭐, 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런 거면 굳이 너여야, 나여야 할 건 없으니까. 그런 거면 굳이 여기, 교회까지 올 일도 아니고…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중에 나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바빠서 간신히 서로 짬을 내는 자리인데 그런 신변잡기나 늘어놓다 서둘러 갈 거였으면 뭐 하러 왔나, 싶어서. 가벼운 걸 원하는구나.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싫어하는구나. 스치듯 건너온 옆 사장이 건성으로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지나가는 말을 하다 후루룩 자리를 뜬 것처럼.
순간 나의 영혼은 시무룩해졌다. 반가움이 전부였고 같이 밥 한 번 먹은 것으로 족하였다. 그러니까. 그런 거지 뭐. 대체 나는 무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럴 거면 우리가 저들과 다를 게 뭐 있나?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9).” 우리의 앎은 그런 게 아니었다. 성도의 문안은 그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주를 바람으로 새 힘을 얻는 거였다. 오히려 안 믿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는 게 별로 아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건 죄다. 우리의 죄는 무지가 아니다. 의도적인 외면이고 알면서도 밀어두는 묵인이다. 돈, 일, 가정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다.
일에 치이고, 돈에 허겁지겁하며, 가정은 적당한 반목을 일삼으면서도 ‘그렇지 뭐’ 한다. 다들 그러고 사는 거야, 하는 정도의 말로 자신의 시험지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보고 만다. 여기서 오늘 말씀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전도 10:2).” 그 시선이, 주된 관심이, 목적이, 가치 기준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를 그냥 하신 소리로 들어서야 쓰겠나? 회사 일이 바쁘고, 가끔씩 늦게까지 동료들하고 술 먹고, 모임이 몇 개 있는데 그 사람들하고 어울리느라 그렇지 뭐. 왜 신랑과 그처럼 데면데면한가 물었더니 별 거 없다는 듯 그리 얘기하였다. 토요일마자 부부동반으로 성경 공부한다며?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방언으로 서로 기도해준다며? 하고 궁금해 하다 그냥 두었다. 친절한 사이지 친밀한 사이는 아냐. 싫진 않지만 좋지도 않아. 없어도 그만이다 싶어. 부부사이의 일이 무슨 닭이 개 보듯 말하였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마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소리로 일관되는 말에, 에구 이놈아! 하고 나는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우린 10년 동안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어. 근데 이제 애들도 좀 크고 하니까 내가 좀 억울하게 살았다 싶은 거지. 겅중거리듯 오가는 말이라 내가 어찌 거들 게 없었다. 굳이 그걸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들 그게 뭐? 하고 대들 거여서, 에구 이놈아! 하고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교회를 이뤄가며 조금은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같이 성경공부를 할까? 하면, 하고 있어! 하는 답변이 돌아오고. 그건 그게 아니야.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아! 하고 말하면 그게 뭐? 하면서 자신들은 원어로 성경을 연구하고 있어서 잘 안다고 여긴다. 그래도 좀 뭐라 하면, 그건 선생님 생각이고. 그래서 선생님이랑은 이런 소릴 하면 안 돼, 선생님이 싫어하는걸 아니까, 한다. 그건 내가 싫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하셔, 라고 말해주면 다 각자 하나님이 있는 거니까, 한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구나. 그런데 하필, 낮에 설교 원고를 다 마치고 읽었던 책이나 성경이 로마서 1장 18-23절의 말씀이었다. 죄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관심이, 사랑이 전혀 다른 것이다. 무엇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는가의 문제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1).”
오른 쪽에 있느냐 왼쪽에 있느냐의 문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다. 무지가 결코 아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자기 의지의 문제다. 의도적인 견해다. 주관이고 가치다. 그 지배가 우리를 이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6:15).” 무엇에 팔렸느냐의 문제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7:14).”
박사학위를 따면 어떻게 되는 거니? 너무 바쁜 삶에 제동을 걸고 싶어서 물었다. 딱히 뭐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하고 되물었더니 이런저런 말을 잇다, 서로가 겉도는 것을 인정하였다. 종일 와서 일봐주고 살림해주는 사람 두고,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일이 없으면 하다못해 사우나라도 하고 들어가는, 거리두기였다. 얘기를 듣는 동안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느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그런데 결국 그게 아니었나?
누구에게 내어준 삶인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 그 막대한 노력을 들여 바쁘다 바쁘다하면서, 그러느라 아이들도 건사하지 못하고,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또한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24).”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서로는 한 몸을 이룰지니.
시계를 보며 서둘러 이 말 저 말을 하는 바람에 내가 거들 게 별로 없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우리의 죄는 무지가 아니다. 뚜렷한 거역이다. 외면이고 다른 길이다. 어쩌다가 아니라 확실한 왼쪽이다. 그러니 이를 끊으실 이가 주님뿐이라. 거듭난다는 게 왜 그처럼 근원의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방언을 하고 원어로 성경을 보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기는데, 여전한 등살에 살 수가 없다.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그러니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3-4).”
그렇지 않고는,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없는데도…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잘 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나름 바쁘게 살고 있었다. 내 안의 적대적인 거주자는 누구인가.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그러니 어쩌면 좋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분명한 것,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잘 가라, 하고 돌아서면서 못내 아쉬웠던 게 그래서였을까? 필요하다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거니. 내가 나서서 거들고 뭐라 하면, 그만 보자는 소리로 들을 테니까. 오늘은 그렇구나, 하는 근황 정도로 족하겠다. 기도 좀 하라고 하시는 거였구나, 나는 생각하였다. 그저 막연하니, 잘 지내겠거니 했던 일이 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안의 애통함을 바라시는 거였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이 확고한 다름을 그저 다 그런 것이려니, 하고 치부할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 영혼에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전 10:1).”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마음이 또 수고가 누구 못잖게 간절한데, 우리 신랑은 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는 소리에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돈, 일, 사랑은 당장 나의 신앙에 따른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돈을 벌어서 뭐하는지,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을 하는지 톡, 한 방울만 떨어뜨려보면 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곧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시 129:6-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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