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봉석 2017. 6. 12. 07:3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도서 12:1-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마음이 어려웠다. 낚시라도 갈까, 하여 저수지로 나갔다. 모처럼 햇살이 곱고 하늘은 청명하였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둘러앉아 있었다. 왠지 괴리감이 느껴졌다. 차 안에 앉아 지켜보다 돌아왔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 뭐해, 교회로 갔다.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었다.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공연히 우울하였으나 울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려 먹먹해지는 게 싫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읽던 책을 들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럴 수 있는 게 복이다. 더는 그럴 수조차 없는 때가 이르리니,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말씀을 머금고 여러 번 되뇐다. 아내가 전화를 했다. 어디야? 하고 묻는 걸, 당연히 저수지라고 말했으나 믿지 않았다.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바람도 사람도 물도 새들도 없었다. 어디야? 하고 다시 묻는 걸 아무 말도 안했더니 글방으로 간다, 하고 나왔다.

 

청년의 때, 아직은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 시절이 있다. 젊음은 참 대단한 무기여서 그야말로 무서울 게 없는 것이다. 뭔들 끄떡없을 것 같고, 뭘 해도 마땅할 것 같고, 뭐든 괜찮을 것 같은 때에 누가 구차스럽게 창조주를 기억하려하겠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아내와 딸 앞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각별히 이 말씀을 음미하였다. 가장 두려운 것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때가 오나니,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일 거였다.

 

아!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3).”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하나님은 뒤로 물러나신다. 해를 등졌을 때 앞에 놓이는 건 제 그림자뿐이다. 해를 바라볼 때 그림자는 뒤에 남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4-35).” 홀연히 당할 때가 이르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누가 이 모든 것을 지으셨는지, 그게 부당하게 여겨지고 막연하여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해도 바로 그 쓸데없는 것 같은 것을 지으신, 창조주를 기억하라. 둘이 있다 하나만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때가 이르리니 설마, 하고 안이할 때에 기억하라. 그리고 36절이 (없음)으로 처리되었다. 원문이 손실됐거나 없다는 것으로 그냥 37절을 36절로 채워도 될 거였는데, 굳이 (없음)으로 둔 것은, 그 비워둔 자리에서 여러 말씀이 솟구치게 하시려는 게 아닐까?

 

데려가심과 버려두심의 순간이 너무나 부지기수여서 누군 췌장암 3기 판정을 받고 채 돌아누워 주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전에, 누군 그의 곁에서 어떤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더듬어 찾고 있을 때에, 동생은 언니를 의지할 때, 남자는 사귀는 여자에게 위로를 얻고자 할 때, 마음이 어려워 다시 교회로 올라와 소파에 널브러지듯 기진하여 누워 있을 때에, 안쓰러워서 신랑을 찾아 교회로 나오던 때에, 누구나의 ‘청년의 때에’ 그 무수한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36절, (없음)은 아우성치는 듯하였다.

 

그런 때가 언젭니까? 하고 묻자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37).” 풀풀 불만과 원망이 모일 때, 회의와 갈등이 있는 곳에 나른함과 막연함이 모여들 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에, 이 좋은 날에 덧없음으로 설마, 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우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지만,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어느 정도는 단련이 되었는가. 전에처럼 감정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기껏 저수지까지 나갔다가 돌아온 까닭도 어쩌면 내가 낚시를 그렇게 배웠던 게 마뜩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낚시를 낚시로 즐거워하는 게 아니라, 도망치듯이 쫓겨나서 혼자 청승을 떨 듯 시름을 달래던 거여서 말이다. 그땐 참 그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길게 담배 한 모금을 뱉어내던 것으로 한사코 나는 나의 창조주를 기억하려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끝까지 하나님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발치께부터 짙은 그림자는 앞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구나. 마치 도망치듯 저수지로 나갔다가 번번이 되돌아오곤 하였던 게 그거였구나! 그냥 아무 데나 앉아서 예전처럼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으로 위로를 삼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기껏 나갔다가 되돌아오곤 하였구나. 그런 내게 오늘 시편의 말씀은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것 같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그랬을 때,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발버둥 치듯 기를 써봐야 그게 오히려 교만이었고 오만함이었던 것을. 아이를 생각하며 그 한 영혼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서운함에 괘씸하고 서러웠던 것을 고백한다. 주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아이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걸 알아주지 못하나, 싶은 노여움이 또 서글픔이 나를 쥐고 흔드는 거였다.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큰일과 놀라운 일을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그쯤하면 잘 될 줄 알았던, 내 마음의 교만이었다.

 

이를 알고 주 앞에 내려놓을 때,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아무 생각 없는, 아직 어려서 인지능력이 없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젖 뗀 아이’다. 사리분별이 가능한 것이다. 자기주장이 뚜렷할 때이고 그 고집이 엄청날 때이다.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셨다. 의지적인 일이다. 그리 찾게 하신 것을 표현하고 있다. 비로소 안도하는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느껴진다.

 

발버둥 치며 뭔가를 두고 씨름하던 아이가, 떼를 쓰듯 안간힘을 쓰며 고집을 부리던 것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 성질을 부리고 화를 내던 일이, 비로소 수긍하고 엄마 품에 안길 때에의 고요와 평온이다. 수동적인 게 아니라 지극히 능동적인 것이다. 강제로 이끌린 게 아니라 의지적으로 그리 파고드는 선택이었다. 아내는 덤덤하니, 왜 기껏 딸내미가 준 5만원을 들고 낚시를 갔다가 도로 왔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싱겁게 웃었다. 우리는 같이 영화를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떡볶이 순대 어묵을 사서 딸애와 같이 저녁으로 먹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게 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이는 의지다. 무의식이 아닌 의식이다. 타의가 아닌 자의다. 스스로 그리 한다. 그리할 수 있는 정도의 ‘젖 뗀 아이’다. 그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안에 일렁이는 마음과는 무관한 것이다. 현실은 여전하고 아이들로 인한 마음이나 형편에 따른 사정이나 시무룩한 기분은 아무리 여전하다 해도,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는 충분히 그만한 인지능력이 있음이다. ‘청년의 때에’ 충분히 알만한 때에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3).” 내가 무얼 바랄까? 그래서 아이가 뭘 더 나에게 이로움을 주겠나? 그랬더니 교회가 부흥하여 수백 명이 모인다 한들, 수천 명의 그 사람들이 나의 영화로움이 되겠나? 나는 기도하였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91:15).” 그리하여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4).” 아멘.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서 누리는 고요와 평온으로, 청년의 때에 내가 나의 창조주를 기억하리라.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6-7).” 모든 게 다 때가 있듯이 또 홀연히 잃을 때도 오나니,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10).” 그 말씀이 내 곁에 어머니 품처럼 계심으로, 아멘.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