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 11:1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편 130:6
도대체 이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 오늘 말씀은 중심이 되신다. 마음을 그 소중한 바람을 무모하다 싶게, 물 위에 던지는 일. 하면 뭘 또 더 나은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창고에 쌓고 자기 배를 불려 만족을 도모하는 일에서 어떤 희망을 바랄 것인지. 떡을 물 위에 던지는 일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음도 아니고 될 대로 되라는 심사도 아니다. 이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일처럼 간절함이고 절박함이다.
아이들이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있었다. 오후께 수영장에라도 갈 거였는데 만사가 귀찮았다. 그러다 우연처럼 읽게 된 말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열심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주를 바라는 게 어째서 복인가, 하는 걸 생각하였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이것이 오늘 전도서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하였다.
그렇지 않다는 건,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우선 성 밖에 있다는 게 무얼까? 상관없는 자이다. 그들의 특징이 분명하다. 먼저는 ‘개들’이다. 그러고 보니 모두 복수로 쓰였다. 그 수가 많다는 것이겠다. 본능에 가까운,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누가 말려! 저도 어쩔 수 없는 본색에 절어 사는 무리다.
다음은 ‘점술가들’이다. 자신이 다 안다고 여기는, 나름의 논리와 기준을 가지고 때를 따지고 이치를 정해 그렇다는 확신에 겨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음행하는 자들.’ 뭐라 한들, 정말이지 발정난 개처럼 속수무책인 경우다. 순리를 역리로 쓰는 덴 자기만족에 겨워 더, 더 자극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할 뿐이다. 이어서 ‘살인자들’이다. 분이 넘쳐 남을 해하는 일에 거침이 없다. 저를 죽여서라도 나를 만족하게 하겠다는 자기애의 결정판이다.
다음은 ‘우상숭배자들.’ 다 저녁에 아이에게 카톡이 왔다. 사귀는 아이 모친이 죽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그러던 말끝에, 걱정하지 마세요, 전 이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요, 절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아요, 하는 확신에 찬 말이 위태롭게 들렸다. 행여 그 믿음이 우상이 될까봐서 말이다. 가장 두려운 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와 ‘~을’의 차이를 묵상하였다. 우상숭배자들이란 심지어 하나님도 우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이다. 스스로 정직하다고 여기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우린 얼마나 자기방어에 능숙한지 모른다. 아담의 후예답게 ‘~때문’이다. 스스로를 그리 격려한다. 남에게 그리 변명하고, 핑계를 핑계가 아니라고 다시 덧댄다. 자기 확신의 두 얼굴이 지어낸 거짓말과 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단언하는 것이다.
그게 나였지 않나? 나이지 않나? 나일 것 아닌가?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4).” 나는 감당할 수 없어서 주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나의 두루마기를 빤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22:14).” 이는 바울 사도의 고백과도 상통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날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오후 내내 누워있어서였을까? 몸이 더 아프고 힘들었다. 늙으신 장모가 후원헌금을 들고 오셨다. 저녁을 대접하였다. 아내는 장모를 배웅하고 좀 더 걷기를 바랐지만 나는 서둘러 들어와 누웠다. 왜 자꾸 아픈지 모르겠다. 외조카아이가 이번 주일에는 다니던 교회에 가겠다고 카톡을 하였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슬픈 마음이 들기도 하였으나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쉽고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왜 자꾸 미안한지 모르겠다. 나를 쥐고 흔드는 의식이 죄스러웠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은연중에 내가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 서러움이 본질을 흐려놓는 것이다. 헛된 영광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더 나은 무엇을 향하신다. 내가 바라기엔 이래서 저러면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래서 내 안에 이는 노여움은 선하지 못하다. 그 마음은 투기다. 시기와 질투로 맥을 같이 한다. 싸우려 드는 것이다.
성경을 찾은 김에 좀 더 살펴보면, 육신의 일은 자명하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19-21).” 마음이 원하는 걸 해! 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하면 뻔하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이를 경계하는 일, 날마다 왜 자신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누굴 탓하고, 너 때문이야! 할 수 없다.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 속에 있지 않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나는 아이에게 성령을 주세요, 하고 기도하기를 바랐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그럴 수 있는 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걸 버려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종의 뿌리는 다시 또 싹을 틔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하나님을 다 안다. 믿네 안 믿네, 있네 없네, 인정하네 인정하지 못하네, 하는 모든 따위는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느니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싶다. 그러면서 감사가 시들어간다. 말로는 감사하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수고와 애씀과 그에 따른 열심을 영화롭게 하려드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보다, 내가 인정하고 내가 믿고 내가 바라는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만족함을 더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한들, 어쩌겠나… 싶어서 마음은 굳어져버리는데,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이 무모하기까지 한 말씀을 어찌 소화하면 좋을까?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10).” 지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기도밖에 답이 없구나. 속상하고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지만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겠다.
내가 그 정도인 것에 대해서는 자괴감도 모멸감도 허망함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9).” 마음에 기뻐해라, 원하는 길을 가라, 눈이 보는 대로 행해라. 다만 이 모든 일로 심판이 있을 줄 알라.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잔칫집에 있는 것보다 초상집에 있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시는구나.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7:1-2).”
묵묵히 가자. 별 수 없는 환경이 나로서 주 앞에만 서게 하는구나.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아!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그러므로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6).”
물 위에 떡을 던져라. 허망하고 부질없는 일일 것 같으나 머잖아 도로 찾으리라.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 문득 드는 생각이 나를 목사로 부르시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어느 훗날 너는 몇 명의 성도를 구원하고, 몇 교회나 세우고, 얼마큼의 종교적인 이득을 냈냐? 하고 물으시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네게 준 말씀을, 그걸 가지고 무얼 하다 왔니? 하고 궁금해 하실 것이다. 다 떠나고 아무도 없다 해도, 나는 과연 말씀만을 붙들고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을 계속하였을까?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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