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전봉석 2017. 6. 13. 07:45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아가 1:8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시편 132:6-7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는 대목을 읽다 메모를 하고 머물렀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나의 그릇됨과 연약함은 계획하신 게 아니지만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의를 이루는 데 합당하게 하신다. 어리석고 못됐다는 게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사 주의 이름에 합당하게 하신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아침에 올라가 성경을 읽다가 새삼 그 의미가 놀라웠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지만 그건 허용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신 적이 없다. 다만 그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존중이고 인격적인 관계다. 그래야 한다는 게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안 그럴 수도 있다는 걸 기다려주는 게 말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앞선 이의 믿음의 발자취가 든든하다. 여기서 누군 이쪽으로 가고 누구는 저쪽으로 간다. 이내 저쪽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이가 있고 예기치 못한 부르심에 이쪽으로 돌아오는 이도 있다. ‘~하였으나’ 누구는 용서함을 받고 누구는 끝내 용서하심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였구나.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건성으로 들어 넘기던 것인데 그것으로 나를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었다. 그런 자리에 나를 두심으로, 아이는 듣지도 않는데 나는 말하게 하신다. 얘한테 이런 말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판단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아는 지식 가운데 가장 고상한 것,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9).” 믿음으로 난 의였다. 죽어 마땅하였을 때에 그 이름을 기억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늘 같은 날이 반복인 것 같지만 날마다 그날이 새롭다. 어려움은 여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의 갈등은 다를 게 없지만, 저 혹시 글방엔 그럼 어떻게 보내야 하나요? 두부가게 아이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3 여자아이. 공부를 너무 안 하고 형편상 보내는 데도 없는데, 책 읽는 건 너무 좋아해요. 엉뚱하게도 나는 그 상황에 교회를 생각하였다. 누가 특별히 오는 것도 아닌데 왜 하나님은 내게 교회를 맡기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보내세요, 같이 한 번 구경삼아 오시죠. 그리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한 것이다.

 

목사님, 하고 아홉 살 된 아이가 들어선다. 뭐, 불편한 건 없으세요? 하고 주인 사장이 들어와 커피 한 잔을 대접하였다. 혼자 누워 책을 읽고, 누굴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가 안녕하세요, 목사님. 하고 인사를 한다. 나는 목사니까, 목사여서도 그러면 안 돼! 하고 일깨우는 내 안의 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 왕따를 좀 당한 적이 있어요, 그때 잘 받아주지 않아서 그런가 뭐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내게 이런 소릴 하는 까닭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아는 가장 고상한 것,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었다. 앞전에 그처럼 갈구하던 친구도 보람도 꿈도 낭만도 부질없는 게 되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렇듯 빙충맞아 아무 것도 변변하니 하는 게 없다 해도,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내 수고와 애씀이 의를 이룰 수는 없었다.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모두는 병들었다. 아이의 신음소리가 쥐고 있는 오락소리에 묻혔을 뿐이다. 아이엄마의 단내 나는 고달픔이 먹고 사는 문제 앞에 가려졌을 뿐이다. 저, 그렇다고 아이를 그냥 보내도 되나요? 그래서 아이엄마는 저녁에 둘째아이 편에 콩국물을 보냈고, 아내와 나는 저녁으로 콩국수를 해서 먹었다. 그러라고 우릴 여기에 두신 거였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리 새겨들었다. 내가 뭘 어째서가 아니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얘는 또 뭔가? 싶어서 주의 의중을 살폈다. 그의 신기한 능력이시다.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다 하게 하신다. 내가 주도하는 일이면 뭔가 나서서 내 의중을 분명히 할 텐데,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4).” 나는 이제 이 말씀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내가 얼마나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위해 살았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런 나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오늘에 두셨다.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나를 부르신 것이다. 나의 경건함으로 얻게 된 게 아니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인 것도 사울이 바울이 된 것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 거였다. 아주 짧은 인사와 잠깐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내게, 내가 어떤 일에 참여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하셨다. 다음 이야기는 나도 모른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는지 정말로 같이 올지.

 

중요한 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그것도 ‘베드로’의 입에서 이런 말씀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믿음에는 덕을 세워야 한다. 덕에는 바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에는 자기만족이 아니라 절제로써 내가 움켜 쥔 것을 놓아야 하고, 그래서 절제는 인내가 필요하다. 한 번 하다 마는 게 아니다. 인내는 막연하게 참는 게 아니라 경건함이 위로가 된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

 

이것으로 형제 우애가 가능하겠다. 내가 저런 걸 어찌 사랑하나, 싶었는데 내가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주님의 사랑으로 저를 사랑할 수 있게 하시는 거였다.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사실 미움으로 씨름하고 있었다. 아이가 싫다. 안 왔으면 좋겠다. 어떻게 다시 보나, 싶어서 심지어는 보기 싫어요, 하고 기도도하였다. 그런 내게 내가 누구인지를 새삼 알게 하시려고,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가는 길에 두부가게 아이엄마와 마주치게 하신 것이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때 늘 묵상하는 말씀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걸어갔을, 형제들이 걷고 있는 그 길 위에서 내게 맡기시는 염소 새끼를 먹이는 일. 오스왈드 챔버스가 곁에 있었던, 존 파이퍼가 그처럼 갈급하였던, 내 믿음의 친구들과 동기들이 함께 거하는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맡기신 일을 묵묵히 준행하는 것.

 

이어서 오늘 시편의 말씀은 성전을 향해 가는 길에 주의 궤를 그토록 사모하였던 이의 절규어린 다짐을 듣게 하신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시 132:6-7).” 누구는 여기 있다 누구는 저기 있다 하지만, ‘찾았도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말고는 내게 그 어떤 고상함도 없다. 나는 그곳에서 예배하리로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자로 오늘에 나를 세우신 게 그의 능력이시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내가 경건한 삶을 살아서 경건에 속한 게 아니라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나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나로 하여금 경건에 속하게 하시는 거였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내 안에 이는 미움도 시기도 원망도 좌절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은 나의 의가 내 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롬 9:30).” 그것을 아는 데는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32).”

 

힘들다가도, 못 견딜 만큼 허허롭하다가도 의지할 것 없는 나의 행위가 외레 축복이라. 가진 게 없고 나은 게 없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수 있는 믿음뿐이라, 복되었다. 다른 걸 해볼 여력이 없다는 게 새삼 다행이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3-14).” 그리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가 1:13-15).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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