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0-1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3
그럴 때 ‘포도원의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꽃을 피우고 곧 열매를 맺을 거였는데 우리 안을 휘젓고 다니는 게 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작은 근심이 또 화가 애써 가꾸어 온 시간을 또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같이 가자, 주의 음성이 들릴 때에 이를 훼방하는 의문과 갈등은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가만히 귀를 기울여 주의 음성을 음미하고 있으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헐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호수를 채우고 요단강을 이루어 사해바다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물이 흘러넘침이었다. ‘헐몬의 이슬’은 아침마다 내게 임하시는 주의 은혜다.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마음에 꽃을 피우시고 곧 열매를 맺나니, ‘작은 여우’를 잡으라.
마음은 원치 않는데 생각은 머물러서 자꾸 아이를 생각하였다. 변호를 하듯 내 안에서 아이를 상대하는 변론이 불쑥불쑥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주의 마음을 바라였다. 서성이다 우연처럼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 중에 <하나님의 일꾼>을 뽑아들었다. 2011년 11월에 처음 읽었으니까, 신대원 3학년을 끝마칠 때였겠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읽은 게 작년 2016년 10월이었다. 나는 항상 주님이 예비하시는 우연을 기대한다. 문득 뽑아 든 책에서 주님은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셨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철저히 의지하라는 것. 회피하지 말고 문제의 현실 속에 있으라는 것.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세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으라는 것.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인간사에 거하며 성경을 훑어 그 안에 거하라는 거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한 영혼을 대할 때 여러 상태의 영혼 앞에서 어찌 처신하고 감당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맞춤형 과외를 받는 아이처럼 시의적절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먼저는 저들의 호소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 환자는 늘 자신의 고통이 절대적인 것이어서 스스로의 문제를 왜곡하게 된다. 곤경에 처한 저의 끔찍함에 주의를 뺏기지 말고,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주의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말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률적으로 그런 케이스로 분류해서 동일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영혼의 문제란 ‘하나님과 나’ 곧 모두의 개별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하나부터 열까지 성령의 도우심에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을 나의 정해진 틀과 생각과 생활방식에 가두지 말라. 성경은 모든 케이스의 교본이 되고 이를 준수하지 않을 때 내가 마주하는 병든 영혼으로 나도 감염될 수 있다. 어떻게 저런 애를, 내가 저런 사람을 어떻게? 하고 의심하면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게 된다. 그럼에도 저를 내 곁에 두신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할 때, 내가 한 게 없는데도 내 분위기 때문에도 저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곧 내가 성령을 의지할 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의 영적인 체험은 저를 압도한다.
곧 주님은 내 눈을 통해 저를 보고 계신다. 내 입을 통해 말하고 계시고 내 손을 통해 저를 어루만지시길 원하신다. 내 발을 통해 저를 찾아가시고, 항상 내 몸에 사시면서 저 한 영혼을 마주대하시길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기꺼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게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리하여 하늘 아래 어떤 영혼도 내가 나서서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포기할 영혼이면 하나님이 내 곁에 저를 두시지도 않는다.
우선은 행복한 불신자가 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행 18:17).” 저는 상관하지 않는다. 구원을 필요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지 않는다. 알아서 정직하고 성실하다. 저에게는 한 번뿐인 인생이어서 귀하고 소중할 따름이다. 무엇으로도 구애받지 않고 그래서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 알아서 행복한 사람이다. 이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다음은 사망에 이르는 사람이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눅 23:8).” 그저 흥미로울 뿐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다. 자신의 죄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잔인하고 유쾌하다. 가책이란 게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사람과 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기도가 얼어붙고 뭐라 할 말이 없는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교회에 있어 작은 여우란 이런 자이겠다. 합리적이며 이치에 맞다. 타당하며 논리적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물론 봉사와 헌신에도 다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를 극대화하여 홍보에 사용하고 여기서 이득을 챙겨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
죄를 잊으려는 사람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 잘못을 회피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모든 걸 잊을 수 있다면 마비된 영혼으로 마음 편히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결국은 절망에 절망을 더해야만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르고 돌아오게 될,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시 107:13-14).” 그러기까진 별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타락한 영혼들이었다. 주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데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 이럴 때 우린 저들을 어찌 대해야 할까?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1:23).”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이 새롭다.
저들의 특징은 뚜렷하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를 버린 것.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교회를 다녔었고, 한때는 믿었었고, 누구보다 열심이었을 저들은 이제 대적자가 되었다. 안 믿는 이들보다 더 악랄하고 무섭게 주를 부정한다.
어쩌다 주를 버린 게 아니라 의도적이었다. 자신의 필요를 따라서 말이다. 그리스도인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데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럴 수 있구나. 본래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거나 그리스도인이었다가 적그리스도인이 되었거나, 저는 거듭남의 차원을 넘어섰다. ‘하나님은 죄인을 이끄시지만 타락한 자는 이끌지 않으신다.’ 내버려두심으로 저가 이내 ‘돌아가자.’ 하기까지,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가 그렇다. 두 아들은 모두 악하였다. 큰 아들은 떠난 바 없지만 들어간 적도 없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타국으로 떠나 타락하였다. 이때 아버지는 저를 찾지 않으셨다. 누굴 보내지도 않으셨고 어찌 지내나 알아보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가 돌아가자, 하고 멀리 나타났을 때 단걸음에 쫓아가셨다. 아버지의 냉정하심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가혹하셨는가를 보여준다. 이내 밖으로 나간 적은 없으나 안으로 들어온 적 없는 큰 아들을 설득하여 맞아주셨다.
타락의 정도는 발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먼저는 발람의 길이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곧 자신의 은사를 허튼 데 쓰는 것이다. 자신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음은 발람의 어그러진 길이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하나님의 의중을 분별하지 못하여 어그러진 길로 간다. 상식과 세상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을 평가하고 그 뜻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에 발람의 교훈이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끌어들여 자신과 같이 타락시킨다.
여기까지, 책을 읽으며 이해하고 메모하였던 것을 정리하였다. 분명한 건 시험 공부하는 아이처럼 신중하게 읽혔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주께 물으면서, 그럼 주님은 다 알고 계셨다는 듯 책을 통해 말씀을 가지고 나를 공부시키셨다. 2011년에 그리고 작년에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밑줄 그었던 부분에서 다시 숨을 고르는 걸 보니, 같은 고민으로 주 앞에 앉았던 게 틀림없다.
아 이 아침,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내게 흐르는 주의 은혜가 귀하다. 주의 명령이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 내가 저 아이로 신음하고, 누구 때문에 무슨 일로 힘겨워하는 까닭은 주님의 마음이었다. 주께서 저로 인해 안타까우신 것이다. 이를 두고 형제의 연합이라 칭하신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3)”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주의 은혜다. 주의 긍휼하심이다. 지극하신 사랑이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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