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아가 3: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양극성기분장애인 조울증 같았다. 누구도 개의치 않고 큰 소리로 깔깔거리고, 좋다는 표시로 친근감을 표시하는 정도를 넘어 예의 없이 굴기도 하였다. 그러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다. 말도 않고 시선은 다른 데 두고 누가 뭐라 해도 들은 체도 않으면서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아이처럼 굴었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보게 하였다. 아이들은 낯선 주제에 조금은 당황한 듯하였다.
물론 건성으로 쓰는 아이, 별 얘기도 아닌 걸 몇 자 적다가 쓸 게 없어요, 하고 밀어버리는 아이도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요, 엄마가 누구랑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빚이 오 억이 넘는데요. 그것 때문에 엄마는 밤에도 새벽에도 일을 나가야 한대요. 위경련이 잦은 아이였다. 아빠가 술 먹고 집에 안 들어올 때 슬프다고 쓴 애도 있다. 외모 때문에 걱정이란 아이도 있고, 동생 돈 얼마를 몰래 가져다 썼다는 아이도 있었다. 한 아이는 아예 글쓰기를 거부하고 내내 딴청만 부리기도 하였다.
밤에, 분주하게 지나치던 낮이 지나고 문득, 우리 영혼은 호소한다. 우리는 본래 다 우울하다. 잃어버린 사랑을 갈구하면서 산다. 이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하여 낮 동안에 열심히 애써 수고하고 남들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부산하였다. 고집처럼 놓지 못하는 것들로 인해서 다른 더 나은 무엇을 쥐지 못한다. 천성이 우울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만 실은 대부분이 우울한 영혼이다. 즐거움으로 위장하고 만족함으로 덧칠을 해대지만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찾았노라.
그런 걸 두고 힘내, 잘 될 거야, 너무 아파하지 마, 행복해야 해, 하는 따위의 위로는 조롱과도 같다. 늘 어디가 아픈 사람은 안다. 사연은 제각각이겠으나 염려와 근심으로 시달리는 심약한 사람에게는 그게 일이다. 둘러싼 환경이 저를 항시 우울하게 하는 데는 어쩌겠나? 아이는 기를 쓰고 활기차고 싶어 한다. 활달할 때 뭔가 생기가 돋는 것 같다. 먼저 말하고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면서…. 결국 아이는 성경공부도 그만두겠다고 알려왔다. 순간 내 안에 이는 어떤, 고질적인 낭패감이 나를 휘어잡았다.
괜히 더 망친 것만 같고, 잘하고 싶었는데 하는 아쉬움만 몰아치는 것이다. 손만 대면 왠지 더 망가뜨리는 것만 같아서,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돌아누우며 마음에는 그나마 붙일 게 없어 난감하였다. 주님, 하고 부르자 입이 먼저 삐쭉거려졌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아 3:1).” 늘 마주하게 하시고 돌아보게 하시는 게 때론 잔인하다. 몸서리쳐지게 싫다. 늘 같은 말이지만 내 몸 하나 건사하는 데도 진이 빠진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은 일을 나는 몰래 돌보고 또 신경 쓰느라 기진하였다. 그렇듯 치과를 다녀오고 수영장엘 갔다가 누가 온다고 해서 기다리다 지쳤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도, 창밖을 내다보는 일에도, 남들에게 말한들 누가 알까? 저마다 힘에 겨운 생을 다하는 것이 이 땅을 사는 모든 생명의 과업이겠거니, 사우나실 안에서 한 노인은 자괴감 섞인 목소리로 ‘잘 죽어야 하는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토라진 얼굴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돌아갔다. 왜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아이의 카톡에 환하게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화내지마, 하고 말풍선을 보냈다. 아이는 응, 하고 답을 보내고 ‘ㅋㅋ’ 하였다. 이게 뭐라고! 그렇듯 대꾸가 있어 감사하였다.
‘우울한 영혼’에 대해 나는 늘 마음이 기운다. 저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내가 볼 때 우울하지 않은 영혼은 없다. 스스로 활기차고 유난히 쾌활한 이는 그 정도의 우울의 늪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에 서른여덟 해 앓는 환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물으셨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의당 ‘네’ 하면 될 일인데 저는 할 말이 많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구구절절 말이 많다. 원인을 따지려 하고, 그 과정을 설명하느라 바쁘다. 들어보면 다들 공통된 사연이 있다. 먼저는 환경 탓이다. ‘물이 움직일 때에(아무도)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어지는 소리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 저의 말대로라면 백날 그래봐야 소용없는 걸 알면서 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의 황당하기까지 한 말씀을 들어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
문제는 아무도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남들 때문에 자신에게까지 기회가 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나는 이 말씀이 같은 뜻으로 들린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우울한 영혼은 우울할 수밖에 없는 건강과 또 환경과 혹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사연을 가졌다. 몸은 늘 아픈데 아파하지 말라는 소린 헛소리다. 힘에 겨워 사는 일에 지쳤는데 힘내라는 소리는 오히려 잔인하다. 엄마의 빚, 오 억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아이에게 마음 편히 가지라고 하는 소리도 개소리다. 의심 많은 도마는 늘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사람이었다. 죽은 나사로에게 가자고 하실 때,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6).”
죽고 싶어요, 하는 아이의 표현에서. 잘 죽어야 할 텐데, 하는 어느 노인의 푸념에서 동일한 맥락을 읽었다. 저들은 늘 자기 힘에 부쳐 정작 봐야 할 걸 보지 못한다. 같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한다. 생각이 너무 많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여러 변수를 생각해야 하고 그에 따른 자신의 불안을 또 고통을 간수해야 한다. 어딜 가려면 남몰래 화장실을 먼저 가야하고, 누굴 만나면 할 얘기와 표정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0:24).”
늘 부산하고 바쁘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 더 나은 믿음을 꿈꾸고 누구 못지않은 의연함과 온유함을 희망한다. 주만 바라고 주만 온전히 따르기를 다짐한다. 그런들, 그러자니 더더욱 힘에 겹다. 남들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힘이 든다. 아이의 귀에 어째서 엄마 빚이 오 억이란 소리가 박힌 것일까? 그러느라 우리 영혼은 우울하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예수님은 그 처방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1).”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마 20:27).”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 있는 자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감당할 정도로, 아니면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럼에도 한사코 늘어지는 변명에 자기변호에 원망에 구슬픈 사연은 우울할 따름이다.
우울한 영혼의 단적인 예는 간단하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19:24).” 그럼에도 저는 아니란다. 저게 그래서 이걸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건 누구 때문이고, 무엇이 나만 그런 것이어서… 구구절절 할 말이 많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성경의 원리는 간단하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왜 나만 그렇지? 하는 자신에 대한 ‘유별난 애정’이 우울증이다. 그것 때문에 정작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했다. 도마의 천성적인 의심은 당연하였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오늘 나에게 이르신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9:29).”
‘활력의 복음’을 강조하는 시대에 우울한 영혼은 넘쳐난다. 기도 외에 다른 걸 찾아 위로를 삼고 어찌 해결해보려 애쓰다보니까, 낮 동안은 항상 분주하다. 정신이 없다. 사느라 드는 수고와 애씀이 우리 영혼을 삼킨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1-4).”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오늘 말씀은 맥을 같이 하면서 우리의 배회하는 우울한 영혼을 붙드신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종들아,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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