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아가 4:7, 16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시편 135:1
나는 우물쭈물하지만 하나님은 조속하시다. 얼른 빈자리를 채우셨다. 아이는 예의바르고 자기 생각이 뚜렷했으며 야무졌다. 너무 그런다 싶었는데, 이런저런 우려가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되바라지고 함부로 군다고 했다. 부모의 걱정이 크다고 들었다. 막말을 해대며 거침이 없는 모양이었다. 얜 뭐지? ‘스스로 속이는 영혼들’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타고난 죄의 성품이겠다. 능숙하다. 이 앞에선 이렇고 저 앞에선 저렇다. 이런 자의 기도는 언제나 도발적이다.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것이다. 스스로 할 만큼 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순종이 없는 신앙은 자기 열심으로 분에 겨워한다. 숨기거나 합리화하거나. 당최 누구의 말도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이름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유난히 자기고집이 강하다. 에이, 설마. 나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일까? 싶게 아내는 아이에 대해 그 부모의 염려를 내게 들려주었다. 어쩐지…. 지나치게 선한 것은 지나치게 악한 것과 같다(전 7:16-17).
그러니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스스로 애써 지나치게 구는 모든 것은 위태롭다. 아니라고 하지만 그 안에 단정적으로 여기는 자기 의가 있다. 이만하면 됐지, 이 정도했는데 뭐! 하는,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20).” 어쩌다 또 하나님이 그리 두셨구나….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이를 생각하였다.
그런 거 보면 그랬었다. 혹은 그런 이가 있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7).” 저는 항상 열심이었다. 누구보다 바르고 나름은 성실하였다. 주장이 곧고 생각은 늘 바랐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순종이 없었다. 젊을 때 잠깐 같이 어울렸던 전도사가 있다. 저도 그 부모가 목회를 했고, 뒤늦게 신학을 하면서 노심초사 주의 길을 더듬거렸다. 말은 항상 유수 같아서 어쩜 그렇게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지. 앞에서의 저와 실제 뒤에서 같이 어울릴 때의 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거칠고 무례하며 함부로 굴었다. 나 역시 다를 바 없어 뭐라 욕할 건 없지만, 저의 깍듯함이 불안하였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었던 게 당연하였다. 말이 번드르르한 이의 공통점은 미처 그 말을 삶으로 깔고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붕 떠있듯 허공만 어르며 살아가는 꼴이다. ‘교회 다니는 애들’이 주로 그런다. 말은 어쩜 그리 잘 하는지. 생각도 깊은 것 같고, 나름 누구에 대한 판단과 무슨 일에 대한 이치를 바로 아는 것 같다. 그래놓고는 자기 말에 겨워 행동은 따로 노는 것이다. 누구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그게 나였다. 그래서 더 크게 보인다.
기도하고 시작할까? 끝날 때 기도를 할까? 어쩐지, 잠깐 주저하였던 마음이 그래서였다. 모처럼 혼자 일대일로 수업을 하게 됐고, 아이의 야무진 자기주장에 갸우뚱하면서도 머뭇거렸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내가 무슨 수로 이와 같은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겠나!
아무나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거였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9).” 먼저 그 귀를 주셔야 할 건데, 어리석음으로 막혔다. 자기 고통, 슬픔, 남들한테 말하기 어려운 고백들, 난처함, 민망함, 속수무책인 자기애, 방심, 나태, 공연한 기대…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지 못하게 귀를 막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게 점점 자라난다는 것이다. 더 대범해지고 논리정연하며 이내 자기합리화에 자신도 속수무책인 것이다. 들을 땐 알겠는데 뒤돌아서면 밟아버린다. 무시하고 만다. 그게 익숙하다.
차마 아이의 이런저런 면면을 글로 옮겨올 수는 없다. 아이아버지는 할 말을 잃었고 아이엄마는 서로가 거침없이 쌍욕(?)을 해대며 싸우곤 한다. 마음의 각오를 하라는 소린가?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내의 이런저런 말은 새삼스러웠다. 행여 나의 열심이 앞서지 않기를 위해 기도해야겠다. 한 영혼에 대한 마음이 주의 마음이 아닐 때 오히려 없는 이만 못하다. 아니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말씀을 읽다 헉, 하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외식할 때 저를 지옥 자식으로 만들 수 있다! 이보다 더 끔찍한 게 또 있을까? 안 하니만 못한, 차라리 안 하는 게 더 나을. 한 영혼을 향한 괜한 열정이 주의 마음을 밀어낼 때, 이처럼 악하고 고약한 결과를 낼 수 있구나.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행 13:50).” 그럴 수도 있었구나(43-50). ‘땅에서 올라온 짐승’ 같은 사역도 있을 수 있겠구나(계 13:11-17).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14).” 하는 일이 잘 되고 바라던 게 속속 이루어질 때, 우상을 만들라. 그것으로 표를 삼아 더욱 견고해질 수 있었다. 행여 나의 마음이 섣부른 열심으로 만족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마치 내가 뭘 좀 하겠다고 여기는 마음이 주의 마음을 밀어내는 거였다.
낮에 읽었던 책과 성경구절이 왜 나에게 필요한가를 이 아침에서야 이해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19-20).” 새삼 아이를 두고 뭐라 하는 게 아니다. 가만 보면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른아이가 수두룩하다면 아이어른도 넘쳐난다. 그러게, 교회로 보내시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나를 그리 여기시는가.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 1:5).” 보잘것없는 자로 별 볼일 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 같으나 그게 아니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4:7).” 그리 여겨주시는 이의 마음이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16).”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새 풍랑과 씨름했다(마 14:22-33). 어쩌면 그와 같은 고통이 없었더라면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올라갈 수 있었을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28).” 어디서 그럴 용기가 났을까?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29).”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게 믿음이었다. 저쪽에서 보면 이게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다. 그 사이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4).”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고난은 우리 안에 일어서 주의 마음을 불어 향기를 날리게 한다. 언제부턴가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절호의 기회를 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애가 그만두고 오지 않기로 한 날, 나는 실의에 빠져 공연히 일을 그르친 건가? 싶어 우울하였다. 온갖 생각이 마음을 휘젓고 있을 때, 빈자리를 무섭게 새로 채우셨으니, ‘얜 또 누군가?’ 그러고 있을 때 오늘 말씀이 귀를 울린다.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아 4:16).”
주님의 마음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 그런 거 보면 정말이지 인내가 필요하다. 절제가 따라야 하는 것이고 말이다. 내가 알아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 두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려니. 오늘 말씀은 그 해답을 제시하는 것 같다. 주가 원하신다. 무모하게 나는 또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 하게 되는데, “오라 하시니 …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29).” 이어서 물에 빠져도 괜찮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 다시 또 세우신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남방으로 옮겨가다 그러했고, 다윗이 오랜 전투로 나른하여 옥상 위를 서성이다 그러했고, 베드로도 우쭐하여 주의 길을 가늠하다 그러했다. 그러했으나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으셨다. 앞서 내가 아이를 어찌 잘한 것인지, 아니면 또 망가뜨려버린 건 아닌지, 시무룩하여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주님은 내 손을 붙잡으셨다. 왜 꼭 이런 애들일까? 싶다가 그게 다 날 위한 것임을 고백한다.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35;2-3).” 주는 선하시다. 그 이름이 아름다우시다. 결코 허투루 나를 여기에 두시지 않았다. 설령 나를 죽이실지라도, 그의 이름을 찬송하라.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욥 40:23).” 저는 나의 구원자시라.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그러므로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시 135: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0) | 2017.06.18 |
---|---|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0) | 2017.06.17 |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0) | 2017.06.15 |
일어나서 함께 가자 (0) | 2017.06.14 |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0) | 2017.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