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전봉석 2017. 6. 17. 07:3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아가 5:1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낚시에 대해서는 좀 해봐서 안다. 들을 때와 상상할 때는 낭만적이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지루하고 고되고 막연하여서 이걸 왜 하고 있나? 싶다. 이론으로 배울 수 없다. 눈으로 본다고 알 턱이 없다. 누구에게 전해들은 걸로도 어림없다. 직접 해봐야 그 지난한 모든 과정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매력을 체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저마다 타고난 기질이나 성품도 한 몫을 한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이다. 양치는 목동 일에 대해서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 먼저 떠오르면서 낭만적일 것 같다. 하나 이것도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걸 미뤄 짐작할 수 있겠다. 똥을 치우고 바닥을 걷어내고, 목초지로 양을 몰고 연약한 것을 목에 둘러매고 산을 내려와야 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와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부분을 오래 머금고 있던 하루였다. 좀 우울하기도 한 것은, 늘 그런 것처럼 늘 그런 타령이어서 싫증이 났다. 왜 우울한지에 대해 나열하는 것조차 우울하여서 성가시다. 이걸 눈치 채고 아내는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글방으로 나왔다. 같이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게 고작이지만, 일부러 아내는 더 재잘거렸다. 왜 흥이 나지 않는 것일까? 비빔국수를 먹고 들어왔다.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괜히 더 시무룩해졌다.

 

낚시를 할 때 가장 어려운 건 기다림이다. 혹시나 싶어서 자리를 옮겨도 보고, 떡밥을 새로 개고, 곁에서 누가 조과를 올리기라도 하면 기웃거리며 난 뭔가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꼭 딴청을 하고 한 눈을 팔 때 입질이 오고 뒤미처 낚싯대를 채보지만 헛손질이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했는지 알겠다. 저들이 잘하는 일로, 평생을 업으로 삼았던 것을 뒤집어 주의 일에 쓰시겠다는 것이다.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이 훗날에 주의 백성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천막을 치던 바울이 우리 몸을 주의 거룩한 성전으로 짓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럼 선생님은 써요? 아이에게 꾸준하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하자 한 아이가 당돌하게 물었다. 문득 내 사는 모습이 증거가 돼야 하는구나, 생각하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열어 날마다 글을 쓴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하는 바울 사도의 자세가 내게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말이 필요 없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으로의 삶을 살아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텐데….

 

우울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도대체 나는 그럴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말로 하면 오히려 더 민망하여서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도 어렵다. 혼자 찧고 빻고, 지지고 볶고, 난리브루스에 염병을 더하는 꼴이라, 저를 어쩌면 좋습니까? 하고 주님께 아뢰다 서글픔이 또 구슬퍼서 우울하였다. 맨날 그 타령이 그 타령이어서 서글펐고, 이를 가까운 아내에게조차 말하기가 한심스러워서 구슬펐다. 그냥 가만히 주님, 하고 부르면 금세 입을 삐쭉거리며 울고 싶은 아이처럼 우울하였다.

 

아니에요, 무슨, 별 말씀을, 오히려 우리가 감사하죠. 다 저녁에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아내가 호들갑을 떨었다. 두부가게 아이엄마였다. 작은 애는 공부방으로 오고 큰 애는 글방으로 온다. 그냥 인사치레려니 하고 말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하여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삶의 현장에 우리를 두신 것을 말이다. 그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그런 상대’가 된다는 게 ‘내 양을 먹이라’ 하는 말씀에 부합하는 삶이 아닐까?

 

내 양을 먹이라, 하시곤 먹일 것을 주지 않으셨다. 도대체 무엇으로 먹이라는 건가?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신 31:12).” 그러기 위해 나를 먹이로 내어주어야 하는 거였다. 주님이 주신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내가 사는 것처럼 나에게 주신 나의 살과 피를 저에게 주어서 먹고 마시게 해야 한다. ‘그들에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며’ 그리하여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는 일.

 

난기류를 만난 나의 하루 비행이 고단하였다가 가정예배를 마쳤을 때, 아이엄마와 통화하는 아내를 보면서 깨달았다. 감사하다는 소릴 우리가 들을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준다는 게 신자의 삶이 아니겠나? 생각하였다. 내 살과 내 피를 내어주어 먹게 하자니 그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생각 같아서는 확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고, 이런 걸 내가 왜 하고 있나? 싶어서 급 지루함이 또 짜증이 목을 조여오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을 두면 좀 나아질 법도 한데 보면 또 꼭 그런 사람이 뒤통수를 치고 내빼버리니까 징글맞다.

 

가령, 애들을 두고 할 소린 아닌데… 일주일에 마지막 수업이라 할 수 있는 금요일 오후에 오는 아이들은 정말이지 진이 빠진다. 3, 4, 5학년이 한데 묶인 얘들은 우선 두 형제가 전형적인 뺀질이라. 그 왜 잘 사는 집 애들로 약삭빠르고 임기웅변이 능해서 뭐라 한들 또박또박 말대꾸에 시키는 건 도통 하질 않는다. 또 한 녀석은 좋게 말해서 낙천적이지 아주 능글맞은 게 어른을 뺨친다. 전에 같으면 쌍욕을 퍼붓고 당장 그만두라고 내쫓았을 텐데, 또 참고 기다리며 내가 내 기분을 추스르기에도 버겁다. 애들이 돌아가면 진이 빠져서 풀썩, 주저앉는다.

 

나아지는 게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나, 싶어서 자꾸 하나님께 되묻곤 한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주시는 답은 잠자코 ‘내 양을 먹이라.’ 하신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일이다. 마침 들어가는 길에 아이엄마가 들러, 우리 애 어때요? 하고 물었다. 그러니 형편없어요, 애가 왜 그 모양입니까? 하고 말해줄 수는 없지 않나? 아이가 내 앞에서 보이는 모든 것은 나니까 그러는 것이다. 이를 누구에게, 특히 그 부모에게 말한다는 건 더 이상, 아이와의 관계는 끝나는 일이다.

 

사사롭게는 이런 것인데, 내 살을 준다는 건 그렇게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찢기고 뜯기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모멸감도 수욕도 마다하지 않는 일이다. 내 피를 마시게 하는 일은 내가 가장 소중한, 시간이나 마음이 돈이나 그 무엇이든 내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일은 그러므로 막중하였다. 쉽지 않죠. 동기 전도사가 말했다. 아니, 불가능하지. 나는 말했다. 쉽지 않은 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을 그럼 왜 주님은 요구하신 것일까?

 

앞서 주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주님과 상관없는 자이다. 곧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이를 경계하시는 데는 그럴만하였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이 말씀을 전하는 이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베드로라는 것이 감동이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데 따른 먹을거리가 되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억지로 말고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그게 되나? 그래서 바로 그 앞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 붙는다.

 

아이들을 대하다 욕지기가 올라올 때, 화가 나는 건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말을 들어 처먹질 않고, 뺀질거려 속을 뒤집어놓다가도, 오늘은 좀 일찍 가야 해요. 우리 교회 여름 성경학교가 있거든요. 오늘 교회에서 자요. 천진난만하게 구는 아이의 밝은 목소리에서 딱 그만할 때 나를 본 것이다! 목사 아들로 내가 저렇게 재수 없었을 텐데…. 결국 내가 내 살을 주고 내 피를 내어주는 것 같지만 실은 앞서 누군가의, 믿음의 순종으로 나를 먹인 거였다. 저도 누구의 살과 피를 먹었을 테고,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전 4:17).” 나를 저 아이들 앞에 보내신 까닭은 주께서 가르치신 그 사랑을 생각나게 하시려는 거였다. 유난히 힘들게 하는 대상은 영락없이 그게 나를 닮았다. 아무리 아닌 척 해도 나는 저보다 더했다. 딱 나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주님을 따른다는 건 막연한 구호나 낭만적인 허상이 아닌 것이다. 주를 사랑한다는 건 실체가 없는 감미로운 고백이 아닌 것이다. 뜯겨지고 찢겨지는 일로 자존심 상하고, 화딱지가 나고, 좀이 쑤셔 견딜 수 없는, 쉽지 않은 아니 불가능한, 그래서 더욱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단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는, 실제의 실체다. 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내가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것을 글로 쓰는 것은 그래야 살 거 같아서이다. 아니면 당장 갈 바를 알지 못해 금방이라도 포기할 거 같아서다. 죽을 거 같아서고 힘에 겨워서다. 뭐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나마’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 같아서이다. 딱 이만큼만, 묵상하며 쓴 글만큼 살게 해주세요. 아니 반에 반만이라도 살게 해주세요. 나는 염치불구하고 기도한다. 돌아서면 또 그 타령이 그 타령이지만, 오늘 말씀은 그런 내게 속삭이신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아 5:1).” 내가 주의 양을 먹일 수 있는 것은 나도 그의 동산에서 먹어야 하는 일이다. ‘나의 친구들아!’ 주가 부르신다. ‘내 누이, 내 신부야!’ 주가 부르신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이와 같은 말씀을 읽으며 위로가 되고 눈물이 핑, 돌면서 감격이 솟구치지 않으면 무엇으로 견딜 수 있을까?

 

주가 하신다. 주께서 이루신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4).” 고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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