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전봉석 2017. 6. 18. 07:12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아가 6:3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시편 137:5-6

 

 

 

문득 이처럼 말씀을 곁에 둘 수 있는 여건이 환경이 귀중하였다. 혼자 모호하겠다 싶으니까, 오스왈드 챔버스와 오스 기니스와 마틴 로이드 존스와 아버지의 책 들을 곁에 주셨다. 같이 성경구절을 묵상하고 그 내용을 따라 음미하는 일이 새삼스러웠다. 토요일, 이제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 놀기 좋은 계절이다. 좀 재미난 뭔가를 해서 아이들을 오게 할까, 하던 생각을 접었다. 곧 또 기말고사 기간이라 아내도 토요일이면 오후께 수업을 하였다. 여느 날과 같이 나는 오롯이 혼자 있으며 깊음을 더했다.

 

‘나 자신을 변명하려는 욕망을 고쳐주소서.’ 어거스틴의 기도를 메모하였다. 책을 읽다 밑줄을 긋거나 누구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오래 곱씹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내 이야기고 나 들으라고 주님이 전해주시는 음성이었다. 문득 나의 이 묵상글이 변명의 구술이 되지 않는가? 생각하였다. 누구와 얘기할 때 또는 혼자 주 앞에 섰을 때도 불현 듯 내가 얼마나 나를 자주 변호하는지,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나를 마주하였다.

 

부득불 내 할 일은 하나,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돌연 생각이 멈춘 것은 ‘부득불’ 때문이었다. ‘하지 아니할 수 없는, 또는 마음이 내키지 아니하나 마지못하여’서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나는 바울의 정직한 글쓰기가 경이롭다. 가감 없는 성령의 이끄심이 두렵기까지 하다. 저의 고백은 진실하였다.

 

내가 부득불 할 일이다. 이는 결코 미신적인 두려움이 아니고 종교적인 의무도 아니다. 나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냐면 마치 장관을 이루는 거대한 폭포수 앞에서 저절로 입이 쩍, 벌어지는 것 같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안 그러려고 하는데 마구 심장이 뛰는? 읍, 하고 숨이 한 데 모여 입을 틀어막아도 새어나오는 신음소리 같은? 부득불, 그리하려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17).” 도저히 내 자의가 아닌, 저절로, 어쩔 수 없는, 도무지 감출 길 없는, 눈이 부시게 환한….

 

아, 사명이란 그런 것이구나. 내가 주님을 택한 게 아니었다. 믿음이란 내가 주를 주님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새삼 의기양양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님의 교회라는 것. 그 자리에 나를 놓으셨다는 것.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라는, 충만한 안도감.

 

그러므로 나의 몰골이 아무리 하찮아도 천박하지 않으며, 죄성이 여전하지만 더는 죄책을 느끼지 않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애면글면 속을 끓이지만 다 승리한 싸움이며, 비록 없고 없고 없어도 이미 충분한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께 혼자 들어앉아 책을 읽고 말씀에 밑줄을 그으며 이와 같이 만족감을 누리는 정도가 어찌 호사스러운 게 아닌가! 아등바등, 죽을 똥 살 똥 다들 기를 쓰고 사는 세상에서 나만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오후 다섯 시, 나는 자전거를 타고 수영장에 갔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은 감미로운 음성으로 오롯이 내 것이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아 6:3).” 이를 중의적으로 읽어, 주께서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면서 내가 주님을 생각함으로 읽혀지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어떤 외로움에 대하여 또 육신의 고통에 대하여, 가난으로 운신이 어려운 일에 있어 혹은 끊임없이 몰아치는 앞날에 대한 근심에 대하여도 나는 홀연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가 없다. 여전하여서 아니 더욱 옥죄고 불편하여서 비명을 지를 판국이지만, 그래서 더 신기한 것이다. 이래도 되나 싶게 평온하였다.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 같이,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그럴 수 있는 이유를 화자는 진솔하게 고백하였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 아! 내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곧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것이 축복이었다.

 

유독 몸이 약했던 디모데에게 바울도 그 몸을 잘 건사할 건 물론,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이와 같이 맡기시는 덴 이미 다 이루어놓으신 바가 있어서였다. 그러므로 맡기신 바 이 직분을 흔들만한 무엇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말라는 것,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내가 자의적으로 수고하고 애써야 할 일이 아니고, 그리하게 하실 때 순종하는 게 사명이었다.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신념보다 무서운 우상은 없을 거였다. 아이를 보내시고 안 보내시고는 내 몫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내게 두신 이 날, 내 곁의 이 한 영혼, 저를 붙들고 씨름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향하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래서 조금 저속하게 표현하자면, 망해도 남는 장사가 교회다.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은 이를 맡기심이고,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그가 지으신 세계이며,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시 145:10).” 참 기쁨이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감사였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맡기신 주의 세계를 참 기쁨으로 감사하는 게 사명이었다. 아, 그래서 저는 기뻐하였구나!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나의 약함이 ‘그 때에’ 강함이라. 홀로 남겨두시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달픔으로 쩔쩔매며 누구를 생각하고 공연한 서러움에 치를 떨며 또 환멸이 혹은 슬픔이 나를 엄습할 때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오직 주만을 바랄 수 있는, 주가 아니시면 아무 것도 아무 것이 아니어서, 감사로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였다.

 

그러니 내가 주를 바람은 고결하면서 의당 내가 할 일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주가 아니시면 내 재주가 존재가 가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그럴 바엔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 137:5-6). 하여 은혜로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102:14).”

 

이와 같이 영적인 삶을 갈망할 수 있다는 게 신비였다. 희한한 일이며 어찌 설명이 안 되는 새로움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와 같은 고백이 가능하였구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단 한 시도 주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데 경탄한다.

 

어떤 짜증이 또 불안이, 엉뚱한 생각이 또 갈망이 버젓이 나를 휘젓고 있지만 그것으로 그래서 더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게 신기하였다. 내 안에 이는 시름을 덜 수는 없으나 시름함으로 더욱 주의 이름을 사모하게 하셨다. 금세 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내가 아무리 굳건하여도 주가 그의 얼굴을 숨기시면 나는 또 근심한다.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게 이런 것이겠구나….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아 6:10-13).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 137:1-4

 

 

그러므로 내가 어찌 세상이 바라듯이 하나님을 바랄 수 있을까.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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