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전봉석 2017. 6. 19. 07:27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가 7:10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시편 138:2

 

 

살며 사는 일에 본이 되는 삶이 귀하였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괜히 나만 혼자 예배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하였다. 아이들이 아무도 오지 않아 민망하고 송구하였다. 바보 같지만 찬양을 부르다말고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슬그머니 안정제를 삼켜야 했다. 멀리서 아버지까지 오셨는데 말이다.

 

도대체 나는 언제쯤 의연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 열심으로 말씀을 증거하셨다. 모처럼 말씀에 집중하며 설교를 메모하면서 들었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가 어려서부터 예배 시간에 설교를 받아 적게 하셨다. 뭘 안다고 어린 나는 대지와 소지를 나누고 그에 따른 성경구절을 받아 적었었다. 특히 성경은 몇 장 몇 절 숫자를 먼저 적고 그게 어딘지를 적는 게 요령이었다.


그렇게 적은 설교노트를 가끔씩 검사하였고 성경을 읽을 때면 한 장에 얼마씩 용돈을 받았었다.“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12-13).” 마치 어린 디모데를 향한 바울 선생의 가르침 같았다. 아이들이 오지 않아 나는 끙, 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전해야 할 말씀을 증거하셨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어느덧 내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모처럼 느끼는 집중이었다.

 

우리 기독교인의 5가지 확신에 대한 설교를 받아 적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내 감정으로 신앙을 가지는 게 아니라, 안 믿어져도 믿는 게 믿음이었다. 믿음이란 그런 거여서 믿을 수 없으니까 믿는 것이고, 바랄 수 없으니까 바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상’이란 역설의 의미가 믿음이다.

 

우리 구원의 확신도 때론 감정적으로 믿어지지 않아도 성경이 그리 증거하시니까 믿는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성경이 말씀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믿는 자들의 특권인 것이다.

 

둘째, 사랑에 대한 확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반사적인 게 아니다. 무조건적인 것이다. 아직 내가 죄인일 때 사랑하신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이는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죄인일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나아가 하나님과 원수일 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셋째, 응답의 확신.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구할 때 이미 구한 바를 받은 줄 알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때론 내가 원하는 게 아니어도, 전혀 엉뚱한 방향의 무엇이어서 어리둥절하고 낯설고 불편하여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러니 응답을 내 주관대로 받으려할 때 도무지 감감무소식일 때가 많다. 왜냐하면 기도 응답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넷째, 인도의 확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주가 이끄시는 삶에 대하여 그 인도하심은 영원하시다. 우리가 주와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저와 함께 할 때이다. 그렇지 않을 때 나의 감정이 지식이 견해가 판단이 상황과 여건이 주를 인도하려고 든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그러니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지 않으시면 믿어도 믿는 게 아니고 주와 동행한다 해도 동행하는 게 아니었다. 내 안에 이는 어떤 변론이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내 판단과 기준에 따른 나의 오만과 불손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섯 째, 승리의 확신.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4-6).” 앞으로 싸워 이겨야 하는 승리가 아닌 것이다. 이미 넉넉히 이기신 승리였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싸움이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이 이김은 주의 것으로 이미 승리한 싸움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여느 ‘꺼리’에 좌우하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치 처음 듣는 말씀처럼 새롭고 당연하였다. 아이가 오지 않아 시무룩하였다가 그와 상관없는 평안함 앞에서 신비로웠다. 예배는 하나님의 것임을 새삼 경험하였다. 마치 예배를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하고 그래서 신경 쓰이던 것이라고 여겼었던가 보다. 한 번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가, 아버지는 설교 노트를 두 권 사오게 하셨다. 그리곤 더 좋은 노트를 당신이 갖고, 여러 장의 쪽지에 메모되어 있는 설교 원고를 옮겨서 적어달라고 하셨다.

 

그때가 의정부 쪽으로 이사 가기 전이었으니까, 서울 숭곡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가 맞다. 글씨를 예쁘게 잘 쓰니까 부탁하신다는 거였는데, 그래봐야 까까머리 초딩 아이가 잘 쓴들 얼마나 잘 썼겠나 말이다. 아무튼 아버지는 나를 구슬려서 거반 노트 한 권의 설교 원고를 다 정리하게 하셨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걸 내게 주시는 거였다. 그래서 한동안 그 설교 공책을 가지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걸 어따 써먹나 하고 투덜거리기도 했었다. 물론 그 노트는 이제 없어졌지만, 그래서 지금도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 주의 사랑이 얼마나 신묘불측하신지. 신기하고 묘해서 어찌 미리 헤아려 알 수가 없다. 그땐 내가 그럴 줄 알았나? 한데 이 아침, 내가 주께 속하였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지. 주께서 나를 얼마나 끔찍이도 귀하게 여기셨는지. 내가 죄인이었을 때, 아직 연약할 때, 알지 못할 때에도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이 조금도 흔들리신 적이 없었다.

 

지극히 사소한 사소함에도 내 사랑하는 자의 사랑이 속하였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6).” 그리하여 내가 여름 날 추수하는 날의 얼음 생수 같이 주를 시원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이 말씀은 목사 안수를 받던 때에 들었던 설교 본문이다. 이를 기억하는 것은 습관적인 메모 덕분이다.

 

아,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시 138:2).” 늘 주께 아뢰는 것은 한 영혼을 사랑하되 그에게 끌려가지 않기를. 아이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되 저로 연연해하지 않기를. 내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되 이를 우상으로 삼지 않기를. 오직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행여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들조차도 주의 말씀보다 우선하지 않기를.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아가 7:12)

 

아, 주가 이루신다. 그리하여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