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사야 2:22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시편 141:8
벌써부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글방에서 블라인드를 치고 돗자리를 덧댔는데도 창 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가열차다. 어두울 때나 밝을 때나, 생을 다하는 날까지는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이 끝이 없다. 그러나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6).” 이를 위해서도 기를 쓰고 무엇을 준비하고 대책을 마련하지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자신의 수고는 물론 타인의 도움도 마찬가지이다. 셈할 가치도 없는 날을 두고 마치 천 년은 더 남겨둔 사람처럼 기를 쓰는 꼴이 가관이다. 막말이 오가고 남을 겨누어 비방과 비아냥거림과 비판이 난무한 세상이다. 다 나름의 판단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겠으니 누가 뭐라 한들 들릴 리 없다. 뉴스를 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드는 의문들 뒤에 그럴 수밖에 없는, 고착된 영혼의 뻔뻔함 앞에 치를 떤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발람의 길을 조심하라는 말씀의 경고가 새롭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빌 2:15-16).” 나에게 두신 은사를 허투루 쓰는 데 있겠다. 불의의 삯 때문이다. 돈은 만병의 근원이다. 십계명의 처음과 끝이 모두 돈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신 말씀을 단박에 밀어내는 것이 돈이다. 오늘과 같이 소비 사회를 사는 동안 돈은 모든 것의 매개가 되고, 그 필요성 때문에 우선이 된다. 이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두고자 하는 데 필연적이다. 부자는 왜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는지 알겠다. 저는 나름의 천국을 소유한 것이다. ‘나 외에’ 말이다. 필요 이상의 모든 돈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불의의 삯은 본래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을 엉뚱하게 재해석하게 만든다.
그래서 분별을 못하고 그릇 행하는 길은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여기서도 ‘삯을 위하여’다. 아무리 고상을 떨어도 돈에 웃고 돈에 운다. 아니라고 하지만 돈을 따르는 덴 명예도 권세도 거기서 나기 때문이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당연히 그리로 눈이 돌아가듯 마음은 거기로 향한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어그러진 길로 가는 것이다. 분별할 능력을 상실했다. 돈에 이끌리면 말이다. 누가 대놓고 돈돈거리나. 마치 아닌 척 굴지만 그것으로 만족을 얻는 것이니, 십계명의 끝도 돈 때문이 아닌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이를 원할 때 돈이 필수다. 돈이면 다 해결된다. 목사로 주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하지만 발람의 어그러진 길은 여전한 것이다. ‘화 있을진저’ 발람의 어그러진 길은 그 교훈을 더한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곧 삯을 위해 달려갈 때 저는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누구 앞에 말을 들내는 일은 사뭇 두려운 일이다.
이를 무마하려고 이중인격자로 사는 경우가 되지 않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두렵다. 늘 내 안에 악독이 가득하다. 이런 나를 존 번연은 ‘양다리 걸친 사람’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마음은 늘 불안과 원망으로 가득한데 이처럼 말씀 묵상을 하면서는 마치 하나님만으로 가득한 삶이기를 바라니. 아, 혹시 내가 발람은 아닌가 하고 두렵다.
마음이 위선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다. 가령 문자를 해놓고 하루 이틀 답이 없을 때 내 안에선 이미 단정적인 서운함이 또 분이 가득해진다. 그럼 그렇지, 싶은 냉소적인 마음도 들면서. ‘겉으로 누구에게 옳게 보이나 안으로는 불법이 가득하도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정말 내가 이 아이들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서 민망하기까지 하였다. 그래놓고는 내 몸이 고달프니까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어깨가 유난히 아파서 자꾸 생각이 멈춘다.
그럴 때면 내게 항상 다가오는 한 인물이 있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다. 저의 업적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병들었고 버림받았고 생을 다하는 동안 구걸하다 죽었다. 이보다 비참한 인생이 또 있을까? 그런데 저가 천국에 들어가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나는 엊그제 아이가 왔을 때, 그럼에도 생을 다하는 것의 숭고함에 대하여 말해주고 싶었다. 저의 고통이 또 고통이 숭고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생을 다하는 데 있어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저의 이름을 단서로 할 때 그 의미는 새로워진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늘 익명으로 누구를 지칭하시는데 단 한 번, 그것도 ‘나사로라 이름 하는’ 구분을 분명히 하셨다(눅 16:19-25).
어제도 부산에서 고독사로 숨진 사람을 포함해 이달에만 다섯 명이 고독사로 발견됐다. 죽은 지 5개월 만에 사체가 발견됐는데, 61살 윤 모 여인. 기초생활수급자로 6년 전부터 자식들과 의절, 뇌종양 수술 후 혼자 고통을 견디다 죽었다. 5년 사이 60%가 증가, 지난해에만 1200명이 넘는다. 다섯 시간마다 한 명 꼴로 죽는 셈이다(MBN뉴스 참고). 그럼에도 그리하여 주어진 생을 다하는 데 있어, 이는 생명을 주신 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충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자로 산다는 건 그래서 무서운 일이다. 무관심을 바닥에 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타협이 또 자기합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수고한 자신을 위해 어느 정도는 누려도 된다고 여기는 한, 삯을 위하여 불의의 길을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시 141:8).” 내가 이를 극복하려는 게 아니라 주께 아뢰는 일이 값지다. 즉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사 2:11).”
그러므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2).” 오늘 말씀은 품고 있는 의미가 무겁다. 내가 내 몸을 위하는 것, 나의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것, 그리하여 셈하는 여러 가치와 기준과 판단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 그러므로 ‘내 눈이 오직 주께로만 향하며 나는 주께로만 피하오니’ 하는 다윗의 기도가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생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병들었고 가난하고 버림받아, 부자의 집 앞에서 개가 와 그 헌데를 핥는 끔찍한 지경이었다 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주어진 생을 다한 표본이 아닐까?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시 141:8).” 되뇌어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이런 처지에, 어떻게 이와 같은 환경에서, 여건이 또 상황이 그렇지 못한데도, ‘만물이 다 내 것이라.’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3).” 아!
그리하여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 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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