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전봉석 2017. 6. 24. 07:18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이사야 4:3-4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8

 

 

 

‘주께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하는 말씀 앞에 머문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나의 속됨과 온전치 못함에 대하여, 그럼에도 주의 말씀 앞에 앉는 염치없음에 있어, ‘아침에 나로 주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합니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 영혼을 주께 드립니다.’ 하는 기도를 읊조린다. 이게 무슨 내용인가, 하여 인터넷에 성경의 장과 절을 쳤더니 말 그대로 대단하였다. 블러그와 카페가 부지기수였다. 난다 긴다 하는 기라성 같은 내용들 앞에 놀라웠다.

 

실내에 있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한낮의 열기는 대단했다. 점심을 먹고 수영을 다녀와 설교 원고를 마저 작성하였다. 소파에 드러누워 <굿 윌 헌팅>을 보았다. 다섯 시를 조금 넘겨 마지막 초딩 아이들이 오고, ‘이기심’이란 주제로 <파리대왕>을 보여주었다. 도통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아 ‘영화논술’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기의 과정을 통해 글쓰기의 유익을 알게 하고 싶었다.

 

모든 게 넘쳐나는 세상이다. 지식이 더욱 그렇다. 공부할 마음만 있으면 넘쳐나는 게 이론이었다. 우연히 성경 본문을 검색했다가 그처럼 각양각색의 글이 많은 데 놀랐다. 하긴 누가 내게, 왜 책은 안 내요? 하고 물었을 때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게 그래서다. 그럼에도 ‘지식 없는 소원’을 본문으로 설교문을 작성하고는 내가 깨달은 바가 컸다. 몰라서 병이 아니라 알아서 병인 세상이다. 다들 말도 참 잘하고 글도 참 잘 쓴다. 영적으로도 부자냐 가난하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특히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 보면 그 유익이 확연하여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본문을 또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데 놀란다. 잘 쓰냐 못 쓰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로 살아야 하듯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부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형편이 어떠하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눅 16:20).” 그렇지, 그런 상태에서 저가 바랄 게 무엇이었겠나!

 

묵상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아이들과 소리 내어 책을 읽을 때, 나는 또박또박 천천히 읽기를 지도한다. 저도 모르게 단어 뒤의 조사를 바꾸거나 띄어진 부분을 붙여 읽음으로 그의 의미를 무색하게 한다거나 심지어는 전혀 엉뚱한 단어로 읽어버린다거나 할 때, 전체 내용은 어찌 알겠지만 그 농밀한 맛은 음미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자꾸 흐름을 끊더라도 다시 읽게 하고, 어느 문장에서는 멈춰서 있게 한다. 후루룩 국수 말아 먹듯이 읽고 마는 건 신문 읽기 정도면 족하다. 가정예배 때 같이 성경을 읽을 때도 말이다.

 

아무튼 마치 처음 아는 사실처럼 나는 이런 블러그가 수도 없이 많다는 데 놀랐고, 성경 한 구절을 검색했을 뿐인데 저처럼 많은 지식의 보고가 수두룩한 데 놀라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식 없는 소원’을 작성하고 있을 때 말이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잠 19:2).” 이 둘은 한 몸이다. ‘지식 없는 소원은 발이 급하다.’ 아는 것과 지식은 좀 다르다. 마치 논설과 논술 같이 말이다. 둘 다 설득을 목적으로 하지만 논설은 설득적인 주장 글이라면 논술은 논증적인 주장 글이다.

 

아는 것은 체험으로 그 상식을 더할 수 있지만 지식은 바른 근거를 가진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 있지만 지식은 일부러 그리 자세를 취해야 한다. 저절로 아는 게 늘지만 지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아이가 한글을 깨우쳐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아는 건 뭐라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겠는 것이고, 지식은 그것을 정립하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아는 정도로 지식을 삼으면 발이 급하게 돼 있다.

 

딛고 아는 발길은 막연하여 위태롭다. 살아봐야 아는 인생은 그래서 위험하다. 젊음을 유난히 찬미하는 인생은 어리석다. 다 그 때가 있나니, 이 모두를 주장하는 게 성경이다. 우린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다. 살아봤더니 그게 아니더라도 성경이 우선이다. 말씀으로 오신 주 앞에 그러므로 찬미와 영광을 올린다. 소리로 오셨다면 그 의미가 모호할 수 있고, 그림으로 오셨다면 그 내용이 함축적일 수 있고, 느낌으로 오셨다면 각자의 감각이 주관적이어서 난해하였을 것이다. 이 모두를 한데 모을 수 있는 게 말씀이다.

 

결국은 다섯 가지의 감각적인 이미지도 언어로, 말씀으로 그 의미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 14).” 나는 비록 미숙하고 어리석지만 글자를 다루며 사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는 것은 어린아이의 정도라면 지식은 장성한 자의 영역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어린아이든 장성한 이든, 둘 다 살았으나 그 누림은 사뭇 다르다. 천국도 마치 그와 같아서 좋고 좋은 곳이지만 그 쓰임은 각자에게 다르다. 돈도 사랑도 권력도 그러하다. 돈이 돈으로 있을 때 돈돈거리는 노예로 살지만 돈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을 때 그 너비와 깊이가 다른 것이다. 사랑도 사랑으로만 희구할 때 쾌락에서 그치지만, 하나님의 세계로 확장할 때 그 농밀한 감사와 축복이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땅에서 어찌 그럴 수 있나? 주를 경외할 때 족한 줄 안다. 그리하여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시 37:16).” 단정적인 말씀 앞에 의아할 거 없다. 자족의 비결은 일체의 감사를 동반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저는 ‘지식 있는 소원’을 가졌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이는 주시는 것이지 내가 도량을 넓혀 스스로 체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일체의 비결은 주신 삶을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 이와 같은 당연한 진리는 삶의 현장에서 얻는 것이지 이론이 아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7).”

 

늘 송구하고 민망한 것이 말씀을 더해주시는 만큼 살지 못하는 삶의 정도 때문인데, 가만히 보면 이를 깨닫는 게 또한 복이었다. 자꾸 불편한 건 더해주시는 지식에 따라 내가 아는 상식이 깨어지는 과정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16:8).” 공의를 향한다. 당연히 죄악 된 나는 불편하다. 이때 느끼는 불편은 경건한 것이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고백은 결코 자기 환멸의 언어가 아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실제 삶의 그 일상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하는 거였다. 그리하여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19:1).” 주 앞에서 성실한 자를 당해낼 적수는 없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28:6).” 이런 저를 주님은 이렇게 정의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미 이 땅에 사는 날에도 천국은 저의 것이었다. 어떻게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는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풀렸다. 결코 그의 가난이 또 질병이, 모멸이 또는 부끄러움이 저를 소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저가 있던 그 부자의 대문 앞이 천국이었다. 저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천국의 잔칫상이었다. 개가 와서 헌데를 핥는 비참한 처지에서도 저는 이미 천국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어느 순간 문득 이대로 죽어도 좋아, 싶을 만큼 감사가 또 찬송이 넘쳐날 때가 있다.    

 

나의 몽상이 망상이 아니라 묵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 에너지원은 감사였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어떤 일을 바라고 구하다가 순간 ‘아니에요.’ 하고 주께 고할 때가 있다. 어떤 서글픔이 또 고통이 나를 옥죄는 것 같아 서럽다가도 아니에요, 하고 감사를 하게 된다. 누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다, 아침마다 지팡이를 짚고 걸음마연습을 하는 풍 맞은 어느 젊은이를 마주칠 때, 늙어서 고약하게 성질만 부리는 어느 늙은이 앞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감사가 주의 뜻이다. 아내 때문에 투덜거리던 마음을 회개한다. 몸이 또 형편이 여의치 않아 우울해하던 마음을 회개한다. 누굴 욕하고 무엇을 원망하던 심정을 회개한다. 감사가 막히면 회개뿐이다. 달리 방도가 없다. ‘심판의 영’으로 혹은 ‘소멸의 영’으로 주께서 우리를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주께서 ‘더러움을 씻기신다.’ 그러하기까지 볶이고 부대끼는 일에서는 감사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

 

아직은 내 발로 딛고 걸어서, 맨 정신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 도우심을 바라고 구할 수 있는, ‘나사로라 이름 하는’ 나의 하루가 복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붙들고 살 수 있는 때가 말이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사 4:3-4).”

 

그리하여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8).” 기도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