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5-6, 18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편 140:12-13
자만이란 자기만족이다. 자신의 관점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우쭐해하며 뽐낸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셨는가 하는 데 따른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지혜 있는 체 하는 것이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그렇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나만, 모든 관점이 하나님 아닌 자신에게 쏠려 있다면 영락없겠다.
부자여서 그럴 수 있지만 가난해서도 그럴 수 있다. 건강해서 그럴 수 있지만 병이 들어서도 그럴 수 있다. 누구를 사랑해서 그럴 수 있지만 누구의 사랑을 희구하느라 그럴 수도 있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에 함몰되어 있는 한 뭐라 한들, 그 관심은 자신에게 쏠려 있게 돼 있다. 그걸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무얼 어떻게 하란다고 될 일도 아니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래서 답답하였다. 주신 삶을 다하는 게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가장 기본일 거였다. 어떠하든, 그럼에도 사는 일은 고귀하였다.
그래도 요즘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어렵게 아이가 왔다. 살이 많이 쪘다. 먹고 노는 게 일이라 뭐하니? 하고 묻는 게 민망하였다. 당장 학교에 내려가서 휴학을 연장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적처리가 된다고 했다. 어디 취직을 해서 돈을 좀 벌어야 하는데, 어디를 누가 어떻게 소개해서 뭘 하게 될 거 같다는 얘기를 하였다. 앞서 나는 중2 여자아이들에게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 혹은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해 글로 써보게 하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생소하고 새삼스러운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실은 그 자아가 나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나는 그리 듣는다. 깨어 있으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3).”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중2 아이들이 돌아가고 아이만 남았을 때, 늘 그 말이 그 말 같은 일상의 허접함에서 사는 자의 참 삶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떤 특별한, 무엇을 바라는 게 인생이 아닐 거였다. 예수님은 평소가 늘 성령의 내주하심이었다.
이는 기도하고 늘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을 때이다. 뭐든 보여주지 않으면 돈을 안 주겠대요. 아빠에 대해 말하며 아이가 툴툴거렸다. 뭘 보여 달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는 아이에게 나는 말했다. 모르겠는 게 아니라 싫은 거겠지. 그래야 하는 걸 알면서도 그러기가 싫은 것이야. 먼저는 아빠가 싫으니까. 다음은 그러자면 네가 지금 좋아라하는 걸 못하게 되니까! 나는 말을 돌리지 않았다.
살면서 누군들 죽고 싶단 생각을 안 해본 적이 있겠나. 자살충동은 누구라도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를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니라 경고등으로 봐야 한다. 멈칫, 하면서 아찔하게 여겨야 한다. 헛디디면 낭떠러지다. 어쨌든 살고 어쨌든 죽는다는 삶의 이치가 가혹한 것이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정하든, 자신의 의를 스스로 우쭐대며 살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 3:2-8)
때가 있다는 말, 그 때가 온다는 말 앞에 아찔해야 한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그 자리에 내가 없을 때, 있어야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아차 싶을 때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에 대하여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 상담을 가고 약을 타고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이루는 아이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같이 저녁을 시켜, 나는 아이를 위해 기도하였다.
충동이 앞설 때 더는 어쩔 수 어쩔 수 없는 아찔함에 대하여, 겅중거리듯 이 말 저 말만 하다만 것 같았다. 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와 어떤 속상함이 치고 올라왔다. 뭘 좀 어떻게 해주고 싶은 마음과 그럴 수 있는 게 내겐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말이다. 좀 더 솔직한 건 뭐라 이르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을 건데, 아이는 그저 건성으로 듣는 것 같았다. 또 그런 소리구나, 하는 표정으로 아이는 따분해하다 돌아갔다.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가시적으로 뭔가 짠, 하고 드러나길 바랐다. 나야말로 금세 시무룩해졌다. 주가 아니시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생각나게 하시는 아이에 대해 더는 미룰 수 없어 문자라고 하게 하시고, 그것이 ‘양의 소리’일 거였다. 두고 기도하게 하시고 생각하다 힘에 겨워 연락도 해보게 하시면서, 그럼 뭔가, 그래서 어떤 변화가 또 반응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왜 왔다 가나?’ 싶을 정도로 밍밍하여서 속상했다. 주일에 와.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보자. 글을 쓰든, 성경공부를 하든, 이렇게 얘길 하든, 늘어져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살만 찌우지 말고… 늘어지는 나의 잔소리도 엘리베이터가 오자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어깨를 툭툭, 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어떤 알 수 없는, 슬픔 같기도 하고 안타까움 같기도 한, 막연한 두려움이면서 주께 향한 간절한 마음이기도 한. 주님 도와주세요. 어찌 다른 말을 할 게 없었다. 내가 뭐라고 아이가 약을 의존해서 여기까지 왔다 갔겠나. 그저 심심해서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계신 것을 확신하였다. 그게 뭘까? 아직은 감이 잡히지도 않고, 오히려 흐리멍덩하여 이렇게 만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지만, 그것으로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걸 보면!
우리 죄가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심이라. 오라 변론하자.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하나님은 됐다는 식의 모르쇠를 나는 가장 끔찍한 패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 증거로 우리의 나태와 안일은 스스로 자신을 생소하게 만드는 거였다.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다거나, 아픈데 병들지 않았다거나 하는 미련이 가장 큰 미련이다.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까? 아이는 자꾸 늘어져 우울한 영혼을 달랠 길이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아이에게 이 뜻을 바로 전달하기는 한 것일까? 나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헉, 가슴이 다 먹먹하였다. 애가 돌아가기 전에 기도를 한 번 더 할 걸. 싫어하든 말든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에 대해 더 말해줄 걸. 하는 어떤 후회가 또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시 140:12-13).” 주가 하실 것을. 어떻게 그렇게 훅, 다녀가게 하신 이가 아이를 이끄실 것을. 충동적으로 드는 자살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시기를. 그 부모의 무모한 고통과 동생 아이들의 자기무장을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주 앞에서 살리이다.’ 주가 아니시면 더는 살 수가 없다는 나의 고백이 내가 알기로는 내가 깨달은 바가 아니듯이, 아이를 붙들어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6).” 나의 소망은 주께 있음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하는 고백이 내 것이기를.
그리하여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1-13).” 그럴 수 있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
그러므로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시 140: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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