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전봉석 2017. 6. 20. 06:12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아가 8:14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9-10

 

 

 

진실무망(眞實無妄).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망령되지 않고 참되며,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출 18:21)”로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렘 42:5).”

 

일찍 눈을 떴다. 사위가 어슴푸레하게 새소리에 맞추어 밝아지고 있다. 책상위에 크리스천 연합신문 20주년 기념 성경 구절을 바라봤다.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시다, 진실무망. 어떤 두려움이 또 경외가 느껴진다. ‘내가 이 백성을 어찌 하리이까?’ 어제 아침에 읽은 모세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출 17:4).”

 

그런 거 보면 진실하다는 거, 참되다는 거, 성실하다는 거, 이 모두가 경외스러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짓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걸 말씀 앞에 서면 설수록, 알면 알수록 ‘진실무망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야 당연하겠다. 무엇을 숨기고 내가 어디로 피하리이까.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3-4).”

 

그런 내가 주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5).” 그러니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 성령으로 거듭남이란 어떤 체험에 놀라워하며 감사하는 일이라면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건 다 필요 없고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는 것이었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나를 어찌 하셨는가, 간증을 붙들고 성령을 받음은 모든 걸 제쳐두고 예수만 바란다.

 

그리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메모해두었던 것을 보고 이제야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안수하셨다.’ 오늘 말씀이 그렇게 읽힌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곧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8).” 나의 월요일은 그러했다. 이만만하면 좋겠다, 싶게 모처럼 컨디션도 혼자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좋았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를 새로 읽었다. 전에 소설가 김훈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의 문체를 부러워했던 것처럼 나는 요즘 챔버스의 통찰과 직관을 부러워한다. 다른 이의 책을 읽다가도 그 맛이 덜할 때면 김훈의 산문집을 빼들곤 하였던 것처럼 다른 책을 읽다가도 챔버스의 책을 한 번씩 꺼내들면 그 의미가 새로우니까 말이다. ‘거듭남은 간증을 붙들고 성령 충만은 예수만 붙든다.’는 의미가 강하게 와 닿았다.

 

흔히 말하듯 ‘어떠하든’의 원리가 거기에서 성립되는 공식이겠다.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나는 이를 그렇게 읽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1-12).” 하나님 앞에는 흑암이나 빛이나 동일하다. 내가 형통하거나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행복하거나 이것이 나를 쥐고 흔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게 성경의 가르치심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그리하여 기쁠 때는 찬송하고 슬플 때는 기도하라는 것.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 모두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진실무망하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4).” 곧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전 2:13).”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면 주를 바라며 주만 의지하는 것으로 더 나은 삶은 없다.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9:12).”

 

그러니 나는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 이를 바울 선생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들려준 교훈으로 가름하자.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0-21).” 먼저는 변명하지 말라는 소리다. 얼마 전 아이의 엉뚱한 반론에 기가 차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 적이 있다. 무례하고 교만한 저의 말에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는데, 그런들. 알아들을 귀가 없음이니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니 내 속이 불편해서 이를 삭히고 식히느라 애를 먹었다.

 

반론을 피함으로 지켜야 할 게 무언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탁하신 아름다운 게 무언가?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를 바로 알 때,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4).”

 

뭘 더 우격다짐으로 이겨야 할 게 무언가. 어린아이 같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이는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 그저 좋고 좋은 그 좋음으로 주만 바라는 삶이란 게 좋을 뿐이었다. 그러니 무엇을 위한 좋음인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 좋다 나쁘다 견줄 거 없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24-26).” 내가 살아서 남은 사는 동안에 집중해야 할 일이겠다. 종일 들어앉아 이래도 되나, 싶게 가만히 있었다.

 

성경을 읽다 지루하면 책을 들고 누웠다가 허리가 아프면 창가를 내다보며 서성이고, 수영을 갔다가 또 누구 생각에 망설여지는 마음을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기고 하였다. 꼬박 열두 시간을 그렇게 혼자 있는 나의 월요일이 적당하였다. 다시 일주일 선교훈련생들과 합숙에 들어가는 딸애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아픈 다리를 어루만져주고 무료한 마음을 다독이며 책을 읽거나 뉴스를 뒤적거렸다. 고즈넉하니 한가로운 마음이 좋았다.

 

그리곤 이른 아침,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9-10).” 오늘 시편의 말씀을 웅얼거리며 되새김질한다.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는 게 유익한 것은 글로 쓰면서 그에 맞는 단어를 찾느라 집중하는 것이다. 생각은 후루룩 지나가기 일쑤인데 언어를 가져다 생각을 그 안에 담아내는 일은, 이따가 또 다시 그 생각에 머물 수 있다는 유익이 있다. 되새김이란 그런 거였다.

 

오전에 글방으로 가면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아침에 적었던 묵상 글을 읽는다. 점심께 또는 오후께 소파에 누워 나른할 때 언제든 다시 묵상 글을 펼쳐서 읽을 수 있는 유익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묵상을 글로 적어두는 일이 내겐 참 귀한 거였다. 내가 어디에 가서 어떤 상황에 놓여,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신다.’ 주의 손이 나를 붙드신다. 병원 대합실에서 순번을 기다릴 때도,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도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묵상 글에서 이를 확신한다.

 

결국 위엄이 있는 능력이란, 내가 어디서든 그리스도를 느끼고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강권하심이란 내 자의로 인한 게 아닌 것이다. 종종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돌이키셨고 내가 여기까지 왔나, 묵상하는 일도 유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체험은 나의 전인적인 유전인자가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데 늘 주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심에 대하여는, 때론 거칠고 때론 못마땅하여 때론 부정하고 때론 도망치고 싶은 때도 있다.

 

이게 아닌데, 싶은. 왜 이러시는 것일까? 싶은. 그래서 우울하고 또는 근심이 나를 먼저 짓누르기도 하는데,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이는 복음에로 이끄시는 강권하심이었다. 내가 왜 자꾸 이런 책만 읽는지, 이게 또 어째서 읽히는지 가끔은 어리둥절하다.

 

언제부턴가는 성경구절이 많은, 그래서 구구절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책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같은 저자의 글이라 해도 자기 생각이 많은 것보다 이를 성경에서 조밀하게 끌어내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전에 같으면 성경구절은 뛰어 넘겨 안 읽곤 했는데, 이젠 그게 그래서 읽히는 것이다. 이를 오늘 말씀으로 가져다 표현해도 될까?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4).” 그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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