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
이사야 3:4, 1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142:5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는 것에 대하여, 그 허상에 대하여 알려주고 싶었다. 중2, 3 아이들과 같이 <트루먼 쇼>를 보았다. 긴 설명보다, 보고 느끼는 바가 있기를 기대하였다. 몇 번이고 봤던 것이라 새삼스러울 게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몇 번을 울컥, 하였다. 만들어진 세트장을 세상이라 여기고 사는 트루먼은 일찍이 그 일상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이게 아닌데, 싶다가도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저들이 실은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를 알고 과연 그 안에 안주할 것인가, 과감히 그 세계를 깨고 나갈 것인가. 저에게 힘을 주는 것은 그와 같은 거짓을 알리려던 첫 사랑이었다. 그녀는 사실을 말하려다 배역을 잃었다. 그것으로 잃어버린 존재인 줄 알았는데 트루먼이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있는 대상이 되어주었다. 결국 세트장을 빠져나갈 때 연출가와의 말이 의미심장하였다. 나가면 위험하다. 여기가 너의 세상이다. 뭐든 다 해주겠다.
아이들에게 지금 사는 그 삶이 과연 사실인지. 누구에 의한 가짜 인생은 아닌지. 그저 남들처럼 혹은 누가 하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안이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 보니 목표도 꿈도 없이 지내는 것은 아닌지…. 새로 온 중3 아이가 유난히 심각하였다. 나야말로 울컥, 한 것이 영적인 의미가 새로웠다. 이를 어찌 우리 스스로 깰 수 있을까? 미숙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그게 실은 뭔지, 왜 그런지, 되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사는 일들에 대하여 나는 아이들이 고민하기를 바랐다.
두 아이는 교회를 다니고 두 아이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그 두 아이 가운데 한 녀석은 언제 주일 날 왔다가 쑥스러워서 그냥 갔다고 했다. 그리고 한 아이는 그 부모가 병적으로 반대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어찌하시려는가. 자꾸 나는 뭔가 가시적인 걸 바라는 데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이 또한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혼자 또 시무룩하였다가 슬픔이 또 안달이 목을 조이곤 하는 것이다. 왔다 간 아이의 엉거주춤한 마음이 이해가 됐다. 오고 싶다는 생각과 오기 싫다는 마음이 섞여 있는 것이다.
한 번 와봐. 하고 같이 <트루먼 쇼>를 본 셈이니까, 아이는 무슨 생각으로 돌아갔을까?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아무 것도 아닌 그 일이 한 가지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 아이가 오고 안 오고, 하고 안 하고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바심을 내는 일이나 안달에 겨워 숨이 찰 정도이지만 이는 내가 견뎌야 할 몫이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문자를 하고 또는 늘 같은 타령인 저의 말을 들어주고, 격려하며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내 일일 거였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지만 싹이 나고 이삭이 터서 곡식을 맺기까지 내 몫은 그저 무던함인 것이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6-29).”
일상은 늘 그 모양이 그 모양인 것 같아서 ‘자고 깨고 하는 중에’ 나는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땅 속에 있는 게 보이길 하나. 한데 그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물론 전하여 증거 한 말씀 한 마디가 어떻게 그 마음에 떨어져 조화를 일으키는지… 그러기까지 저의 일상은 또한 그에 적합한 환경으로 틈이 생겨 볕이 들고 바람이 돌아 땅은 헐거워져 뿌리를 내는 길을 낼 것이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모든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이 충실한 곡식이라.’ 그러기까지 천하의 모든 조화는 한 영혼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 영혼의 변화를 이끄는 데 있어 나의 영혼은 또 그 몫의 조화를 감내하는 것이다. 이내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그 날이 오기까지 우연 같은 일상의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하나님이 이루신다.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란 뭔가 대단한 역사가 있어 땅을 흔들고 바다를 가르며 해를 가르고 큰 우레와 같은 소란이 있을 때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숨겨진 30년은 이를 증명한다. 일상이 성령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밤낮 자고 깨는 일만큼이나 사소한 일일 수 있으나 그러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이에게 하는 말 한 마디가 문득 주어진 것 같지만 실은 오랜 시간 내 안에서 볶이고 쓸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던 밤이었고, 우울감에 주의 이름을 부르던 호소였으며, 이 길이 맞나? 싶었던 회의하는 자리였고, 다시금 말씀 앞에서 새 힘을 얻는 위로의 순간들이었다.
‘한 번 와봐.’ 혹은 ‘요즘은 어떠니?’ 하고 물을 때가 말이다. 어떻게 그리 되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와 같은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었다. 그리하여 주께 간구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말씀밖엔 답이 없다. 싫어해도 다시 말씀뿐이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삼상 3:21).” 내가 할 일은 분명하였다. 이 미숙하고 어리석은 가짜 세계를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사 3:4, 12).”
온통 나라가 세상이 어리석은 위정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떠받들 듯 모여들어 신의를 과시하는 꼴이 법정에서 구호를 외치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다시 세상에 나오려 하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다가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들이겠구나! 생각도 든다. 소년들을 고관을 삼고 아이들이 다스리게 하였다. 미성숙한 세상이다. 나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학대하는 이가 아이다. 우리의 인도자들이 우리를 유혹하여 다닐 길을 어지럽힌다. 가짜가 진짜보다 진짜스러운 세상에서, ‘트루먼! 가지 마! 여긴 널 위한 세상이야!’
붙드는 게 너무 많다. 좋은 게 넘쳐나는 세상이다. 애들보다 어른이 더 열광하는 ‘인형뽑기집’을 돌면 좁아터진 ‘코인 노래방’에서 아이들이 삼삼오오 껴 앉아 500원에 세 곡의 노래를 부를 때 불콰하게 취한 어른들은 삼삼오오 도우미 아가씨를 끼고 넘쳐나는 노래를 한다.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 이를 어찌할까?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5).” 이 땅에서 나의 분깃이라. 남은 유산이었다.
‘만약 ~하면’이 아니라 ‘~할 때’ 주가 이루신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오늘 내게 두신 말씀이었다. 아이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저는 나를 밀 까부르듯 하나 주께서 날 위해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 그리하여 오늘에 내가 이처럼 말씀 앞에 있는 것이라면,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곧 ‘내 양을 먹이라.’ 주가 두시는 사명이었다. 내가 사는 이유였고, 오늘의 소소한 일상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이루어가는 ‘싹이 트고 이삭이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의 일이었다.
그 날이 오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 오늘 나에게 이 기이한 빛에 들어오게 하신 이의 긍휼하심에 대하여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지치고 쓰러져도, 낙심이 또 절망이 나를 볶아댄다 해도 이 또한 모든 조화의 한 과정이었다. 궁극을 향한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발자국 소리’다. 오늘도 쉼 없이 나의 일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 곧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맛보아 아는 신령하심에 대하여,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1:22).” 이는 순전하신 맛을 기억함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맛이다. 곧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3-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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