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전봉석 2017. 6. 25. 07:36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1-2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편 144:3-4

 

 

 

주님은 나를 극상품의 포도나무로 심으셨다. 망대를 세워 나의 삶을 보호하신다. 그리고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고 기다시는데 자꾸 나는 들포도만 맺는다. 떫고 독하여 먹을 수 없는 것이어서 입에서 뱉어내야 할 판이다. 예수님은 날 위해 기도하신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말씀을 보다 혹은 책을 읽을 때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주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린다.

 

며칠 째 우울하였고 화도 났고 짜증에 겨워 툴툴거렸다. 만사가 귀찮고 어줍어서 공연히 시무룩하였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일어 들풀처럼 나의 하루를 태우기도 하였다. 점심을 먹고 뚱한 말투로 퉁명스럽게 굴다 글방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늘 나는 나에게서 모든 죄악을 본다. 존 파이퍼의 <돈, 섹스 그리고 권력>을 읽었다. 딱 어느 지점에서 아내에 대해, 돈에 대해, 내 안에 이는 어떤 불만의 근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들으라는 듯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하는 말씀이 인용되어, 주께로 말미암은 것에 대해 깨닫게 하였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19:14).” 그러니까 내가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은 오롯이 아내를 내게 두신 하나님께 대한 항변인 셈이다. 돈은 벌어서 취하는 것이겠으나 아내는 주의 은총이라.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18:22).” 이를 외면하고 내 감정에 치우친다는 건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었다.

 

며칠째 어렵게 만들더니, 보기 좋게 말씀 앞에서 부끄러웠다. 내가 자꾸 화를 낸 건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4-5).” 그렇구나! 마치 처음 듣는 말씀처럼 새롭고 송구하였다.

 

딸애가 선교사 훈련 공동체 합숙을 끝내고 일찍 내려왔다. 지쳤는지 교회에 들러 한숨 잠이 들었다. 애들 시험 때라, 아내가 오후께 수업을 끝내고 나왔다. 같이 칼국수 샤브샤브를 먹으러 갔다. 딸애가 야채를 가지러 간 사이, 낮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를 말씀으로 대신하였다. 하긴 우리 둘 사이가 껄끄러우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먹해진다.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는 물론 말씀을 증거 할 때도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는 유익이 그래서이기도 하다. 다투기라도 하면 민망해서 말이다.

 

그런 거 같다. 어떻게 해서든 사탄은 우리를 들고 흔든다. 하나님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그때에 저는 자신을 자부하며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 그러나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34).”

 

그래서 나름 다들 그럴 리 없는 자세와 환경을 구사하지만,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 4:3).” 우린 우리 자체로 특상품의 좋은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그러자고 결혼도 안 하고 음식물에 경계를 더해 조심한다는 것이 오히려 저급하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4-5).”

 

언제 그랬냐는 듯 아내는 밝은 사람이다. 누가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냈는데, 어찌어찌하여 그 애를 글방에 보내도 되느냐고 물었다나? 사연 없는 가정은 없었다. 나야말로 한 게 없는데 우리 아이들을 귀히 자라게 하시더니, 글방에서도 나는 늘 건성인 거 같은데 애들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 애는 주일에 문 앞에까지 왔었다고 했다. 그래, 그럴 거 같았어! 오라오라 해도 귓등으로나 듣는 것 같았는데, 그냥 나는 가만히만 있어도 되는가보다.

 

미장원 애가 좀 말썽인가 보았다. 차마 글로 옮기기 뭐하게 아이는 개차반으로 구는가, 아이엄마가 넌지시 글방에 대해 물었던가보다. 그러게 그게 뭘까? 옆에서 계속 조잘거리듯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아내의 주변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이 무얼 하시려는가, 생각하였다. 토요일 오후, 나에게 두신 마음과 상황과 글과 메모를 보면 ‘감사함으로 받고 이를 즐거워라.’는 것이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잠 5:18-21).” 그리하여 그리하는 것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나의 기쁨은 하나님의 의도다. 그리 바라신다. 꿀꿀해하는 걸 원하시는 게 아니다.

 

그렇구나, 하는 걸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을 읽으면서 상기하였다. 문득 들었던 생각이 이와 같은 십계명을 두신 이유가 무엇이겠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좋자고 하는 게 아니었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하실 때, 그로인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 생이 얼마나 고달플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점을 치고 사주를 보고 누구 말에 이끌려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려야 하는 자의 서글픔을 아신 것이다. 창조론을 인정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무수한 경우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법이다.

 

우상이 생겨날수록 그 수고가 모진 법이고,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서 자신을 세우려는 자의 고단함에 대하여, 주의 날을 기억하지 못할 때 그 돌아치는 분주함을 가름할 길 없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을 때 생활의 구심점을 잃고, 살인함을 치닫는 극한 미움을 분노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며, 간음하는 자의 허기진 마음을 채울 길 없고, 도둑질이라도 해서 갖고자 하는 마음은 그런들 허할 뿐이며, 거짓말하는 자의 지독한 외로움은 밑 빠진 구멍 같고, 그리하여 탐하는 마음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법이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건 우리를 위한 사랑이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비겨서 얻고자 하는 수고로움이 인생을 고달프게 할 뿐이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출 20:23).” 그러자니 그 삶이 오죽 팍팍할까? 기어이 미쳐 날 뛰는 것이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32:4).”

 

아침에 올라가 읽었던 십계명이 저녁이 되는 동안 ‘아, 그래서구나.’ 하는 어떤 깨달음을 또는 또렷한 음성으로 들려지었다. 어쩔 땐 누가 날 엿보는가, 혹시 내 마음에 몰래 카메라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조금은 유치한 비유지만 화들짝 놀라곤 한다. 책을 읽다, 그걸 또 아무 생각 없이 메모를 해둔 것인데, 이처럼 묵상을 하다 또는 아내 앞에서 ‘아, 그래서구나!’ 하는 선명함이 주의 사랑으로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 어떻게 나에게 이와 같은 복을 주셨는가? 나는 차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4).” 그렇구나. 내가 할 일은 주를 경외하는 것뿐이로구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나를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으신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2).” 그리고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그리고 주가 기다리신다. ‘좋은 포도 맺기를’ 말이다. 어째서 그런데 들포도만 맺는 것일까? 첫째는, 돈에 대한 욕심이었겠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있음에 족함을 알지 못하고 끝도 없이 바라고 구하는 마음이다.

 

둘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내 스스로 안주하려는 안일함이다. 주가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는 그의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12).”

 

세 번째는,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 그 끈이 수레를 끌 정도로 단단해졌다. 내가 내 일을 알아서 하겠다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가리라는 자신감이 문제였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19).”

 

넷째는, 타협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그럴 수 있지, 다 그런 거야, 할 때 무너지는 가치는 별 수 없다. 다섯 번째, 그래서 스스로를 옳다 한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자신을 의뢰할 때 더 용감해지는 것이다. 여섯 번째,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능동적으로 죄를 구하는 것이다.

 

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말씀 앞에 앉아 나의 나 된 것을 한탄하며 주께 고한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1).” 주가 나를 이끄시지 않으면 나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2).”

 

주일 날 아침, 아이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