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이사야 6:13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시편 145:17
할 수 없는데도 하는 일은 눈을 돌려 주를 의뢰하는 일이다. 좌절이 되고 낙심이 찾아와도 그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은 주의 선하심을 붙드는 것이다. 해봐야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되는 일과 상관없이 하던 대로 그 일을 준행하는 것은 주께 그 책임을 내려놓는 일이다. 하기 싫어도, 가기 싫어도, 후회와 갈등이 나를 쥐고 흔드는데도 다른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주의 오랜 기다림을 닮아가는 일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그처럼 믿을 수 없는 중에 약속을 붙들고 믿는 것은 주가 일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에 나는 의연한 것이 아니라 무모한 것에 가깝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련한 것 같으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기다림은 실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증명하는 일이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깃든 소원은 기어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내가 말할 때 주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게 하시기를. 내가 하는 이 모든 일이 주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게 하시기를.
예배를 마치고 허전한 마음에 휘청하였다. 딸애는 머리를 하러 미장원에 갔고 아내는 집안 정리를 한다고 분산하여서 나는 다시 교회로 나왔다. 일요일 오후, 가뜩이나 조용한 실내는 고즈넉하였다. 책을 읽다, 돌아누워 어떤 서글픔에 공연히 울먹거릴 때,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하는 말씀을 읽었다.
그래 맞다. 할 수 없는데도 하고, 왜 하나? 싶은데도 하고, 이 길이 맞나? 싶은데도 가고, 왜 나는 여기에 혼자 있는 것일까? 싶은 때도 묵묵히 주가 두신 그 자리에 있는 일 자체가 귀한 사명일 거였다. ‘그루터기’란 그 자리에 있는 게 저의 역할이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거룩한 씨다. 이 땅의 그루터기다. 화려할 것도 없고 당장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는 불모지 한복판에 버려진 것 같으나,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시 145:17).” 주인이 하실 일이었다. 뿌리째 뽑아내지 않으시는 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로 내 역할일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일요일 오후는 쓸쓸하였다. 하지만 그 쓸쓸함은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나사로라 이름 하는’ 시간을, 생각을, 마음을, 가난을, 부요를 제공하였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로도 충분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한 게 없으나 모든 걸 이룬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말씀을 증거하고 그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되어서 다행이었다. 왜 더 마음을 그러했나, 했더니 예배 전에 주인 사장이 뜬금없이 들렀다. 혼자 준비하시는 거예요? 저는 꺼뭇한 턱수염도 깎지 않고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커피 한 잔을 대접하며 잠시 같이 앉았다. 저의 처도 교회에 가는 것 같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운을 뗐다. 뭐라 일러 될 사람이 아니어서 나는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십여 분 그리 앉았다가 돌아가고, 예배는 시작되었는데 아이들이 오지 않아 마음을 졸였다. 하나님께 송구하다는 마음이 맞기나 한 걸까? 죄송하고 괜히 염치없기도 하여, 찬송도 기도도 겉도는 듯 마음이 분분하였다. 설교가 시작되고서야 군포에서 큰 애가 왔다. 반가움이 울컥, 마음을 건드렸다. 그런데 이건 또 조는 건지,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말씀을 듣지 않는 것 같아 애를 태웠다. 설교를 좀 짧게 해야 하는데, 그만하고 싶은데 자꾸 말이 길어졌다. 예배를 마치자 급 피로가 몰려왔다.
천안에서 온다는 게 아무래도 어렵겠지. 수면제를 먹고 자서 못 일어났나? 이 녀석은 아직도 기침이 심한가? 얜 또 서울에서 잤나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들 생각은 또 저 혼자 마음 쓰게 만들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럴 때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면 콧등을 시큰하게 한다. 눈물이 핑, 도는 어떤… 위로이면서, 다시 마음을 붙들게 하시는….
할 수 없는데도 하는 것은 무모한 게 아니라 주를 의뢰하는 일이다. 좌절이 되고 낙심이 찾아와도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것은 미련한 게 아니라 주의 선하심을 붙드는 것이다. 왜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도 하는 일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주께 그 책임을 돌려드리는 일이다. 정말 그랬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프린터로 뽑을 때도 ‘누가 온다고!’ 하는 심통이 생겨났다. 점심 뭐로 준비할까? 하고 아내가 물을 때도 ‘누가 온다고!’ 싶은 불만이 또 억울함이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그저 그 일을 하는 것은, 다른 기대보다 주를 바라는 게 가장 평안해서이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하시는 음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하는 약속 말고는 달리 붙들 게 없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그러지 않으시면 나는 나 하나로도 쓰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시는 말씀 말고 다른 위로는 필요하지 않게 된다(사 41:10). 혼자 도로 글방에 올라와 책을 건성으로 읽으면서도 혹은 괜한 우울감에 혼자 몸을 비틀고 있으면서도, 괜찮아 한다.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일이지만 (혹시 사장은 서너 명이 둘러 앉아 예배 드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또한 내가 의식하여 짊어질 문제는 아닐 거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 정도인 것은 주가 더 잘 아시는 일인데.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바울의 심정도 그러했을까?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는 이 일에 대하여,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하는 사도의 자세가 그런 거였겠다. 할 수 없는데도 하고, 좌절이 또 낙심이 오는데도 할 수 있었던 건, 그 길을 따라 주의 권능이 오는 통로였던 것이다. 아!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저의 기도가 그것이었구나!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는 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죽고 죽어서 온전히 주의 권능만이 도드라져 온전하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이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내가 하려고 하는 마음을 죽이는 일이겠다. 늘 마음을 떠나지 않는 아이들, 한 영혼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게 하시는 게 괜한 게 아니었다. 부질없고 공연하여 허튼 일 같아서 실의가 또 화가 나다가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영광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영영 사라지지 않겠구나!
내가 어떻게 했는데 싶은, 기름기가 다 빠질 때까지 그것 또한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는 인생이라 해도,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사람으로 살다 가는 게 얼마나 영광되고 복된 일인가! 어마어마한 교회도 많고, 목사도 주의 일을 하는 내로라하는 사역자들도 수두룩한데, ‘나 같은 게 무슨…’ 싶은 마음은 교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이내 ‘나사로라 이름 하는’ 자리에서 ‘나사로라 이름 하는’ 자로, ‘나사로라 이름 하는’ 날들을 살다가는 일로 넉넉하였다.
그러니까 참 신기한 건, 그 위로가 또 능력이 착 가라앉아 시무룩할 때 더욱 선명하였다.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외로운 것 같기도 하여, 쭈그려 앉아 바닥에 남은 얼룩을 물티슈로 문질러 닦고 있을 때,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평안이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 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는 것은 주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닌 것이다. 그저 나는 염치없든, 죄송하고 송구하든, 민망하든, 심지어 비루하든, 주를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그리하여,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5:12).”
이 일은 악전고투가 아니다. 내가 애쓰고 힘을 다해 고생스러운 싸움이 아니다. 어찌 표현하기가 좀 그런데, 편안히 누워 어슬렁거리듯 책을 읽으며 ‘나만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은 미안함이 들 정도의 평안이었다.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7:12).” 하나님만 좋으시다면 나는 좋다. 나만 좋다면 하나님도 좋으시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9:1).”
그리하여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시 145: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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