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전봉석 2017. 6. 27. 07:38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6:1-2

 

 

 

대학 기독교 동아리에서 일주일간 수련회를 간다고 아이가 문자를 주었다. 아이에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얼까? 생각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글방에 오기 시작하였고, 중학생이 되면서 글방에서 교회로 우리가 같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아이 부모는 글방을 끊게 하였다. 그럼에도 아이는 몰래(?) 주일에 나와 같이 예배를 드렸고 처음 세례를 받은 여섯 명의 아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그냥 듣고 잊어버리는 것 같지만 말씀은 무의식중에도 활동하시다 필요할 때 성령은 그 말씀으로 이끌어 의식을 선도하게 하신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요 16:4).” 얘가 듣기는 하는 것인가? 이런 애한테 이런 말씀을 전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생각은 그래서 옳지 않다. 아이가 어엿한 성인이 되어서 말씀 붙들고 말씀 곁에서 사는 모습이 신기하였다.

 

워낙 이단이 많고, 스스로의 열심이 스스로의 믿음을 좀먹는 세상이라 늘 조마조마하다. 아이가 어디 찬양집회에 가봤다고 하고, 지금 대학 동아리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도모임을 하고 큐티를 한다고 할 때도 한편으론 늘 걱정도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거기가 어딘들, 그게 무엇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주의 선명한 섭리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얘가 왜 오지? 싶게 막연하여서 이상하기까지 한 경우, 저렇게 건성으로 듣는데 무슨 소용이 있지? 싶은 의구심이 들 때도, 하나님이 하신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3-44).”

 

은혜 많이 받고 와라. 아이의 문자에 답을 하고,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소나기가 지나고 종일 어둑한 실내였다. 옆 사무실 사장이 와서 큰 애가 글짓기 상을 받았다며 인사를 했다. 그건 핑계고 두런두런 말이 하고 싶었던가 보다. 앞으로 탈북여성들을 지원하는 센터로 운영이 될 거 같다며 사업 구상을 말해주었다. 하는 일이 요즘 어떤지, 그 일은 어떻게 됐는지, 저는 말이 하고 싶은 거였다. 홍초를 대접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이는 어디 교회를 다니는데, 무슨 성당에서 어떤 지원 대상이 되었다나? 본인들은 잘 됐다고 하는데 나는 들어도 잘 모르겠다.

 

무슨 얘기 끝에 가정이 바로 서야 아이들이 어쨌든 반듯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어렵게 두 사람이 같이 탈북을 하여서는 왜 서로 별거를 하고 반목을 일삼는지, 그게 또 두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말해야 했다. 물론 아이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보내시라 일렀다. 편하니 친정오빠 같다는 말에 그저 감사의 표시로 들었다. 드세고 거칠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였다. 특히 교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자기 입장이 분명하여서 선을 그었다. 그런데도 종종 들러 이런저런 사연을 이야기하게 하시는 걸 보면, 하나님이 무슨 계획이 있으셨다.

 

가만히 나는 주를 바라는 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맞춤하니 말씀이 나의 기준을 잡으셨다. 분분하여 다들 나름의 열심으로 산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스스로 어떤 보람을 찾는 것 같아 위태롭다. 결국은 돈이구나, 싶게 그 도움을 당장의 실질적인 것에 두는 일은 위험하다. 믿는다던 사람이 믿음을 잃는 것은 본래에 그 믿음이 실은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을 자신의 믿음에 속고 사는 경우도 있겠다. 저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항상 주 앞서도 그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지만 실은 그게 주님이 주신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두렵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성령이 아니시면 그 모양도 향기도 모두 거짓인 것이다. 그런 거보면 은근히 성령을 구하는 일에 주저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너무 깊이 빠지는 걸 경계한다. 성령의 역사는 내게 유용하게, 어떤 일에서 기적 같은 역사가 일어나는 정도로 족한 것이다. 늘 일상에서 내주임재하심에 대하여는 왠지 피곤할 것 같아서 싫다. 너무 그럴 거 같아서 꺼려진다. 이런저런 마음이 성령이 아닌 그 모형으로 족하게 여긴다. 누구로 대신 감동하고 어떤 이의 간증으로 아멘, 하는 정도로 그친다. 단순히 카타르시스 정도면 족하다. 그런데 성경의 기본 원리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절망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가난한 심령이 된다. 전에 아이에게도 성령을 주세요, 하고 기도하자고 했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는 걸 보았다. 싫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이 남의 이야기로 들을 땐 주옥같은데 내 이야기로 가져올 땐 여간 꺼림칙한 게 아니다. 주를 믿지만 주의 것이 되기는 싫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를 고집한다. 그 수고와 애씀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 딱 그만큼, 그 정도 선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 뿐 더는 아니다. 그러는 동안 본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실은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저는 탈북을 하고 한동안 교회를 다녔었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전날에 사장은 그러다 사람들에게 실망했던 걸 빌미로 성령을, 말씀을 거절하였다. 문득 드는 생각이 오히려 이런 자들이 더 소망이 있겠다, 하는 것이다. 여전히 믿는다, 교인이다, 그리스도인이다, 하며 자기 방식으로 믿음을 붙드는 것보다 말이다.

 

가만히 말씀을 의지하는 일, 이 일이 참 귀한 것이구나. 그리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하는 말씀 앞에 오히려 위로를 얻는다는 것.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는 말씀에서 더는 흔들리지 않는 것.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이어서 오늘 아침 말씀을 같이 읽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결국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모든 게 허사였다. 내가 얼마나 주를 사랑하느냐,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정말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아이의 믿음을 그 자세를 염려할 게 아니라는 소리다. 저 연인이 주를 거절하였다는 게 문제가 아닌 것이다. 주인 사장이 교회를 멀리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주가 저들을 사랑하지 않으시면 것도 소용이 없지만, 주께서 저들을 사랑하신다면 것도 문제될 게 없었다. 나를, 우리 교회를 이 자리에 두신 이유겠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의심할 거 없다. 여전히 하나님이 뭘 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내가 이렇게 있어도 되나? 조바심칠 거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주장하시니까 말이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 내가 바라고 구해서도,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혹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임마누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그러니 저 애가 혹시 이상한 데(?) 빠져 있는 건 아닌가? 이 여인이 끝내 남한 사회에서 사느라 삶을 다 소진하는 건 아닌가? 사장이 영영 돌이키지 않을 것인가? 염려할 거 없다. 아니 그럼, 월세나 관리비는 어떻게 충당을 하십니까? 그래서 주인 사장도 걱정하는 것 같던데… 하며 말꼬리를 돌리는 저의 의도는 알 수 없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하는 일이라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게 아니라면 뭘 한들? 어떤 수고인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다만,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 오늘 말씀을 읊조릴 따름이다. ‘나의 생전에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찬송하리로다.’ 살아서 사는 날 동안 삶으로 주께 드려지는 일상이면 좋겠다.

 

결국 주의 성령은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철저히 나의 무가치함을 인정할 때 선명하여진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건 그런 거였다. 다른 무엇으로는 채울 수 없는 허기다. 가난이다. 오직 주만이 나의 구주이심을. 그러할 때,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3-4).” 찬송은 이어지는 것이다. 나의 찬송은 증거하는 일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