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전봉석 2017. 6. 30. 07:40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이사야 10:15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시편 149:1

 

 

 

충동적으로 할 일이 아니다. 그렇구나, 싶어 얼른 시작한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굴레가 된다. 마음에 이는 충동을 다스릴 것을 예수님은 이르신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1-32).” 갈라지는 것도 그러하고 서로 사랑하는 일에도 물론이다.

 

그래서 충동에는 억지 맹세가 난무하다. 절대 그럴 리 없어, 하는 식으로 자신을 스스로 충동질하는 것이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34-36).”

 

맹세나 보증은 앞서 행동을 담보하는 일이다. 충동이란 그런 것이어서 마치 다 잘 될 것 같은 자기 확신의 오만함이다. 이를 지난 주일 날 말씀으로 ‘지식이 없는 소원’으로 봐야 한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잠 19:2).” 당연히 발이 급한 게 맹세다. 충동의 본 모습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어떻게 하겠다고 확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세 번째 만난 아이. 시험을 한 주 앞두고 국어 총정리를 해주기로 했다. 중학교 아이들이 한꺼번에 와서 요약하고 문제 풀고 질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가 전화를 했다. 여차여차해서 못 오게 됐다는 건데, 그럼 될 일을 뒤이어 다음에 뭘 어떻게 대신 하겠다는 말로 재차 먼저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앞서 못 오는 이유들까지도 실은 그게 아니라 충동적인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고 한 것을 쉬 변명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바꾸는 사람의 경우가 대체로 그러하다. 무던함이 연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득함은 제2의 본성이다. 훈련에 의한 것이지 타고나는 게 아니다. 뭘 하자, 하고 금세 변덕이 또 차질이 생기는 사람의 경우 열에 아홉은 변명에 능하다. 늘 보면 그런 경우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핑계가 수두룩하게 생겨난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갑자기 말이다. 6월 셋째 주에 갈게요, 하고 먼저 인사한 아이는 오지 않았다. 그러려니 해야 하는 사람은 충동적인 사람이다. 불쑥, 그러겠다고 하고는 그 말에 책임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맹세를 덧댄다.

 

예수님은 이르셨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57).” 말에 책임을 다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할 수 있는 정도만 말해야 하고, 바란 것을 향해 무던해야 한다. 와야 오나보다, 해야 하나보다, 하는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맹세가 일어나거나 불쑥 뭐에 대해 자신하는 사람은 심약하거나 미숙하거나 충동을 다스리는 연습이 덜 된 사람이다. 충동은 어린아이의 특징이다.

 

한 번 잠깐 해보고는 별 거 아니라고 해선 안 된다. 사장이 건너와 옆 사무실의 이런저런 일을 말하였다. 진득하니 최소한 1년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무라듯 저에 대해 말하였다. 어렵고 힘드니까, 그게 잘 안 되니까 금세 또 다른 일을 벌이는 것에 대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충동은 지푸라기를 붙드는 것과 같다. 혹시나 하는 것이다. 당장을 모면하려는 자구책이다. 변덕인 것이다.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인데 그러자니 얼른 이것을 접어야 할 판이다. 그런 사람은 늘 새로운 일에서 허둥댄다.

 

아이의 변명을 들으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약속이란 게 무의미하다.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는 사이는 별 볼 일 없다. 저의 말이 그다지 신뢰가 없는 것이다. 경우에 맞지 않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사 10:15).”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은 내가 그렇지 않은가.

 

왜 그런 아이들의 실없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가 했더니 그게 나였다. ‘빈말’이라는, 그저 예의상 혹은 상투적으로 던지고 보는 말을 길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는 그게 예의라고 여겼다. 어찌 본말만 하고 사나, 싶었던 것이다. 싫어도 좋은 척, 괜찮은 척, 그래서 적당히 서로 감정상하지 않게, 충동은 그와 같아서 훅, 하고 일었다가 쉬 꺼지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자신이 다짐했던 일조차 ‘그럴 수 있지 뭐’ 하는 조로 가벼이 여긴다. ‘다 그런 거야’ 하는 말로 무마하면서 말이다.

 

도끼가 자랑하고 톱이 큰 체하며 막대기가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한다. 몽둥이가 사람을 들려함이다. 충동이란 그런 것이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에서 왜 이 말씀이 나의 됨됨이를 꾸짖는 듯 들리는 것일까? 내가 뭘 해보려고 하는 모든 게 가소로워서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혼자 재고 따지고, 이 궁리 저 궁리에 여러 가지 일을 모색한다는 게 충동적이었다. 과연 나는 무던함으로 주 앞에 서는 자인가? 주의 사람 치고 즉흥적인 인물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지적 호기심으로 상식을 따지며 주를 믿는 게 아니다. 믿음이란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라 의지적인 순종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그렇지 않고는 번번이 충동에 싸여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럴게요, 하고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신기한 건 누가 그러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데, 누가 그러면 그때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신뢰한다는 것, 사람에게 기대할 수 없는 문제이겠으나 그래서 훈련이었다. 연습은 거듭 행함으로 습관이 된다. 습관은 곧 인격인 것이다.

 

묵묵히 하는 건 돌발적인 충동과 부대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자기 안에 드는 의구심은 끈질겨서 처음 가졌던 마음, 맹세까지도 헐어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의심은 아무리 단단한 결심도 틈을 벌인다. 그런 사람은 흔히 ‘누가 그러던데’ 하는 식이다. 나아가 ‘못 믿겠으면 누구한테 물어봐.’ 하는 게 입에 뱄다. 못 믿겠으면 우리 엄마한테 물어봐요. 아이는 저 혼자 약속하고 다짐하고 확답까지 하였다. 안타깝지만 그런 경우 십중팔구 그 뒤엔 ‘의심하는 부모’가 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문제다. 믿을 수 없으니까 의심하는 것인지 의심을 하니까 믿을 수 없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 나중엔 뭘 믿어야 하는지 모른다. 내가 뭘 믿었던 거지? 싶어진다. 하나님은 연습이 필요 없으시다. 충동적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 말에 책임을 지신다. 끝까지 변개가 없으시다. 구약의 하나님을 운운하며 신약의 하나님을 바라는 이들은 그래서 사이비다. 궁여지책으로 꿰맞추려니까 구약, 신약을 가른다. 하나님께는 지나간 말이 없다. 빈말이 없으시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으신다. 나를 믿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시인의 노래가 마땅하지 아니한가.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그 길이 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성도다. 막연하여서 드는 의구심을 일고의 가치도 없게 하는 사람이 성도다. 그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5).” 그럴 수 있는 게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신뢰해야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건 없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6).” 다들 특징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궁색하고 비루한데 저들은 찬양한다. 충동을 누르고 억제하는 연습이 된 사람들이다. 저들 손엔 두 날 가진 칼이 있다. 사리에 맞게 분별하는 것은 물론 끊임없이 자신을 갉고 닦는다. 비록 그런 자가 희소하여 참 만나기 어렵다 해도,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사 10:19).” 하나님의 사람이다.

 

무더운 한낮이었다. 요즘은 자주 두통이 일고 어깻죽지의 통증이 심하다. 진통제를 먹으면 속이 볶이고, 늘어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도 몸이 괴롭다. 아이들이 와서 국어 요약을 할 때 나는 몇 번을 서성거리면서도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했다. 달리 뭘 할 게 없었다. 그렇다고 앓아눕기도 애매하고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어서, 아이들이 돌아가고 소파에 돌아누웠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실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데 그래서 충동을 다스리게 하신다면 이게 말이 될까?

 

더는 누굴 빗대어 궁색한 변명을 하지 않는다. 누구처럼 되려고 애쓰지도 않고, 뭘 꼭 어떻게 해야겠다는 자부심도 없다. 주어진 삶은 하나님이 나를 강권하심이다. 왜 이런 애 때문에 내가 또 신경을 써야 하나, 싶다가도 가만히 보면 그 애도 주의 강권하심으로 내 앞에 있는 것이다. 부질없다는 말이 그래서 성도의 용어는 아니다. 충동적인 사람은 훈련이 안 된 사람이다. 다른 말로 미숙한 자아가 늘 충동적이다. 신앙도 이와 같아서 좋을 때나 감사면 싫은 날이 더 많은 동안에는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신실함이란 균형 잡힌 신뢰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그 모든 환경이 사람과 사건과 숱한 일들이 실은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강권하심이라는 것. 그렇다면 충동이 없는 하나님의 치밀한 무엇, 어떤 의도, 그 계획하심을 신뢰하는 일이 신앙의 주된 목적이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그런 이가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모든 것을 충동에 의해 이루실 리 없다. 공교롭게도 아프고 힘들 때 주의 의중을 더 바르게 알 수 있는 것 같다. 저는 나를 아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