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7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편 148:13
이어지는 청문회를 보면서 참 너무하다, 싶다. 물론 살면서 사는 날 동안에 어디 흠결이 없는 사람이 있겠나만, 여전히 거짓을 더하고 은폐와 옹호로 일관하는 변명이 애처로워서 처절하기까지 하였다. 단적으로 우리 사회의 면면이 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였다. 뭐라 탓하는 이들의 몰염치함은 그야말로 쓴물이 올라올 것 같다. 나름은 덕망 있고 존경 받는 인물로 살아왔을 터인데, 청결한 삶이란 그래서 묘연한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역설적이게도 그리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가, 생각하였다. 본래의 성향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성품은 갉고 닦아 연마함으로 바꿀 수 있다. 타고난 거에 대해서는 죄도 그러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악은 피할 수 있고 또한 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겠다. 존 뉴턴 목사를 생각하면 그 변화가 가히 놀라운 것이다. 노예선 선장이었던 그가 온유한 자로 목회를 하였으니 말이다.
청결에 대해 읽고 묵상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살인하는 정도만 끔찍한 게 아니라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으로도 지옥 불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또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
일각에서는 ‘현미경 청문회’라 하여 너무 촘촘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에 대해 볼멘소리를 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아예 절망에 빠뜨리신다. 대체 그럴 수 있는 자가 있기는 한 것인가? 살인과 누구 욕을 하는 것과 어찌 같이 두고 말씀하는지. 간음하는 행위와 음욕을 품는 정도를 같은 기준으로 삼으시면 도대체 누가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절망한다.
그런데 주님은 더욱 끔찍하게 말씀하신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이와 같은 말씀을 두고 있으면 나야말로 백해무익이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구나, 좌절만이 밀려든다.
청결은 어떤 행위로 인한 게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구나! 청결이란 아무런 흠결이 없는 게 아니라, 닥쳐온 유혹으로 갈등하고 온갖 시험에 시달려 비로소 참고 견디고 이겨낸 것이겠구나! 아, 그래서 덕이란 여러 갈등을 겪은 이의 느긋함이구나.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그래서였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어제는 글방 관리비가 청구되었다. 나름 아낀다고 아껴, 평소엔 스탠드만 켜고 들어오는 입구 쪽 불도 켜지 않고 아꼈는데 여전하거나 좀 더 나와서 화가 났다. 옆에서 소파를 밖으로 내놔 들어오는 출구가 답답하게 됐다. 같이 쓰는 다용도실을 한 사무실이 멋대로 쓰는 바람에 바퀴벌레가 생겼다. 드나드는 복도를 물걸레질한다고 하는데도 저는 청소 한 번 안 한다. 바닥에 떨어진 광고전단을 보고도 왜 저들은 그냥 지나칠까? 내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불만이 또 욕설이 있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이와 같은 소소함이 전쟁이다.
늘 내 안에 들끓는 음욕을 욕심을 불만을 증오를 원망을 탄식을 내가 빤히 아는데, 그것으로도 이미 살인한 것이고 도둑질한 것이고 간음한 것이라 한다면 도대체 답이 없다. 나는 안 된다. 될 수가 없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을 일깨우시는 거였다. 넌 안 된다. 네 수고와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사는 날 동안 나에게 청결이란 묘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깨닫게 하시는 게 스스로 결백을 주장하는 자로 살지 말라는 것.
내가 내 죄를 알 때, 이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고 주 앞에 선언할 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주가 날 위해 나의 온갖 더러움을 감당하셨다는 것. 나에게는 하나님께 드릴 온전한 행실이 없다. 아주 잠깐이라도 순결한 마음이 없다. 기도 중에도 의심이 또 화가 내 안에 이는 정도이니, 내가 하나님께 내어드릴 결백은 없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주를 의뢰하는 일. 두 손을 드는 것. 이는 단지 그러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장 유용하다고 여기는, ‘오른 손’을 또는 ‘바른 눈’을 하나 빼내고 잘라내는 끔찍한 일이다. 놓기 싫은 걸 놓는 것이다. 그게 내 삶의 낙이라고 여기는 것으로부터 나를 놓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동 이전의 동기고 어떤 행위보다 앞선 성향이다. 본질적인 일이고 그래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께 의뢰할 수밖에 없는. 주 앞에 내가 감출 수 있는 게 무언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그러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까지 주가 아신다. 나는 이제 기억도 없는 일을 주는 감찰하신다. 청결함이란 나의 결백이 아니라, 주의 성품을 덧입는 거였다. 죄 없으신 이의 죄다. 나로 인한 ‘하나님의 열심’이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주가 세우시고 이룩하실 것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6).” 그가 나를 위하여 그리하셨다. 마치 이와 같은 묵상 글을 쓰면 좀 나아질 법도 한데, 여전하여서 나는 수시로 늘 되풀이하여 탄식한다. 내 안의 온갖 더러움으로 나는 한 시도 주 앞에서 결백할 수 없다. 청결하지 못하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아예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이를 간절히 바랄 수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이 정도면 뭐. 나는 평생을 주 앞에서 결백하였다, 말할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시 35:22).” 아뢰고 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흔히 그럴 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따르라고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사람의 언어다. 사람의 방식이다. 그럴 거면 오른손을 잘라버려라.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이시다. 차선책을 찾으라는 게 아니었다. 차선은 최선을 위협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면서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여기는 마음이 모두 그러하다. 어느 목사가 나는 평생을 교회 앞에와 하나님 앞에서 결백하다고 주장할 때 소름이 돋는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내 모든 걸, 주 앞에 내어드리는 것. 흠과 티는 물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도 미처 알지 못하는 죄의 면면까지도. 그리하여서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내가 의를 도모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기를. 늘 불만이 또 원망이 가득하지만 그것으로 주 앞에 엎드리는 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시 148:13).”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다. 죄를 짓지 않으려는, 이것이 죄라는 자각에서 또 고통이 불편이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일이 복되었다.
초딩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유난히 마음이 쓰여 잘해준다고 하는 아이가 오히려 돼먹잖은 걸 볼 때 욕지기가 훅, 올라오지만 이를 주의 마음으로 다룰 수 있기를. 그저 어떤 연민이 아니라 주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 주 앞에 인도할 수 있기를. 나는 못하지만 나는 못한다는 걸 깨닫게 하시는 이가 어찌 행하시는가를 나타내실 것을 믿으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러는 게 결국 내가 주께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0) | 2017.07.01 |
---|---|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0) | 2017.06.30 |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0) | 2017.06.28 |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0) | 2017.06.27 |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0) | 2017.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