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전봉석 2017. 7. 1. 07:42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시편 150:2

 

 

 

늘 같은 시간에 움직이다 보니 마주치는 사람들도 일정하다. 아침에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만나고 이제 막 콩을 불려 두부를 앉는 남자를 만나고 떡을 내고 담배를 한 대 물고 앉은 노인을 지나치면 빵집 주방에서 열심히 반죽을 하는 아가씨와 눈이 마주치고 글방이 세든 건물의 경비 아저씨를 만나고 그곳에서 또 청소하는 늙으신 어머니를 만난다. 누구와는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굳이 그런 게 없이도 눈빛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수영장에서도 늘 같은 시간대에 사우나에 들어가 앉다보니 그 시간대 노인들과 안면을 텄다. 엊그제 저쪽 어디 사우나에서 예순넷 먹은 여성이 냉탕 온탕을 오가다 심장마비로 죽었다며, 왁자하니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줄 알았다. 그이가 평소 어땠다느니, 어디 사는 사람이라느니, 누가 안다느니, 중구난방 말이 말에 꼬리를 물고 돌았다.

 

주인 사장 모친이 뇌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다행히 큰 탈은 없는데 보름정도 입원치료를 해야 할 거라 했다. 아이가 수업을 와서 조모에 대해 안부를 물었다. 아이는 퉁명스럽게 맥추감사헌금이라며 봉투를 하나 주었다. 아이엄마가 보낸 거였다. 종일 설교 원고를 가지고 씨름하였고 더위와 싸워야 했다. 안녕하세요? 하는 일상의 언어가 얼마나 큰 축복의 언어인지 새삼 느꼈다. 소소한 일상보다 더 큰 축복은 없는 거였다. 오전에는 못 견디고 진통제를 먹었고, 오후께는 살만하여 딸애 퇴근길에 메밀국수를 먹었다.

 

매일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으나, 밤사이 안녕이란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종종 이제 할아버지 소릴 듣는데, 한 애기엄마가 자기 쪽 엘리베이터가 일찍 도착했다면서 ‘아버님 이쪽 거 타세요.’ 하며 나를 불렀다. 피식, 웃음이 번졌으나 가만 보니 언제부턴가 노인들 축에 껴서 저들과 어울리는 게 더 편해졌다.

 

나는 노인의 관조적인 시선을 사랑한다. 물론 더 고집불통이고 못됐고 애보다 못한 노친네도 있지만 숨길 수 없는 깊은 시선은 살아온 인생의 관록인 셈이다. 수영장에서 같은 라인을 도는 할머니가 있는데 이이가 심술쟁이라. 한쪽에 몰려 수다를 떠는 같은 부류의 여자들을 싫어하는지 돌아서서 걸을 때면 투덜투덜 그렇게 혼자서 흉을 본다. 그런 그이도 먼 산을 보며 걷기에 전념할 때면 그 깊은 시선이 닿은 곳은 어딜까? 궁금하다.

 

일상보다 큰 은혜는 없다. 그 가운데 온전하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우리가 서로를 돌아보고 문안하는 일은 살면서 가장 덤덤하게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4:46-47).” 모두에게 너그러울 것을, 그러므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이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루 한 날 우리의 일상에 주시는 사명이었다. 그렇다고 꾸며, 대놓고, 의도적으로, 가식을 섞어 그리하는 것은 안 하니만 못하다. 나는 그리 사회성이 좋은 유전자가 아니어서 어떤 이와는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게 거반 일 년이 다 돼서다. 누구는 아직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여전히 어색하다.

 

온전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 목사니까, 성도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니까, 하는 따위의 수식어가 붙는다면 그게 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소리를 변조시키고 표정을 꾸미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위선을 연습하는 게 아니라면 억지로야 어디 되겠나?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성령의 열매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를 마치 하나님처럼 대하는 마음이겠다. 예수님이라면 어떤 시선이셨을까? 어떤 말투로 어떤 친밀함을 나타내셨을까?

 

그런 정도는 ‘남에게의 나’이다. 문제는 ‘나에게의 나’이다. 씨익, 웃다 돌아서면서 궁시렁거리는 심술쟁이 수영장 할머니처럼 구는 게 무슨 온전함일까? 저는 나의 인자한 표정에 속을지 몰라도 최소한 내가 아는 나는 그저 뻔뻔한 것이다. 착하게 살아라, 남을 도와라, 하는 식의 교육으로 배워서, 마지못해, 그저 입에 발린 언사로 베푸는 친절에 대하여는 그다지 옳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애써 수고하는 선행도 훗날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 자신은 기억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은 기억하지 못하시니까 말이다.

 

오히려 주님이 칭찬하실 때 나는 기억도 못하는 것,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 주가 칭찬을 하실 때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그러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너무 사소하고 일상적이어서 기억에도 없는, 아니 애써 무엇을 위한 게 아닌, 그런데 그 의가 의도적이고 훈련된 사람들의 선행보다 더 나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이게 그러니까 얼마나 까다로운 것인가?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면서, 자기 기억에도 담기지 않은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것으로, 그러나 그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나는 그 온전함을 설핏, 노인들의 지긋한 시선에서 마주하곤 한다. 단지 너그러움이 아니다. 괜한 꾸밈도 의미부여도 아니다. 누가 죽었다는 소식 하나에 설왕설래 한참 동안 말이 이어지다가 무슨 연유에선지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네댓 명의 노인들은 각자의 시선에 고정되어 물끄러미 무엇을 응시하였다. 죽음이다. 살면서는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이 너머의 어떤 세계,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누가 나를 이 땅에 살다오게 한 것일까? 내가 살았던 기십 평생의 시간은 누구에 의한 것이었을까? 나는 누구이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질문지 앞에서 망연자실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한사코 외면하고 가벼이 넘겨듣던 질문들이 기력을 다한 팔다리에 혹은 그처럼 즐겨하던 것들에서 떨어져 나와 묻는 것이다. 잠시 동안 노인들은 잠자코 각자의 지점을 응시했다. 누구는 하나님을 떠올리고 누구는 끝내 좋았던 날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상의 우선순위를 정해주셨던 것이구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그리하여 일상의 진귀한 원동력은 그러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마주치게 하신 이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들을 수 있다. 왜 저이가 내 앞에 있는지, 그래서 나의 말 한 마디 혹은 어떤 선행 한 가닥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가 일상인 것이다. 누가 뭐라든, 주께 하듯 하는 것.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초기에 주를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할 때 우리의 팔목을 비틀어놓으시는 거였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내가 의도적으로, 배운 대로, 누구처럼, 어떻게, 왜, 하는 따위의 당위를 일소에 끊어놓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날마다 나의 오른 손을 잘라내도록, 오른 눈을 빼내도록 하신다. 목사니까, 그리스도인이니까 혹은 당신이 노인이니까, 가난하니까 하는 따위의 의미부여를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왜 주께 돌아왔는데 팔목부터 비틀어놓으셨는가 이제는 알겠다. 내 의지, 내 노력이 가장 큰 원수였다. 내가 의지하는 사람과 내가 아는 지식과 내가 붙드는 의미와 상황과 어떤 조건들로부터 시선을 떼게 하시려고, 이 너머 하나님이 어찌 행하시는가 보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 11:35).” 그저 나는 하나님만 보는 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다른 게 보이지 않는 시선 속의 시선이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곳이 나의 일상이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매순간이 새롭게 주를 바람으로 다채로운 것이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의 자연스럽다는 찬사조차 머쓱할 따름인 나의 일상에서,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시 150: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