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사야 12:2-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가만히 앉아 누구를 생각하는 일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그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 놀라웠다. 어느 지점, 나의 생에 어디서 우리가 만나 함께 나누었던 시간과 생각과 마음을 떠올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찌 나를 오늘에까지 이르게 하셨는지 그 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창 밖 열기 때문에 블라인드를 친 실내는 어둑하였다. 책을 읽다 다른 짓을 하듯 누구 생각을 하였다. ‘누구’는 때로 무작위여서 왜 그 사람이 떠오르는지 나는 모른다. 어떤 이는 안타까움으로, 어떤 이는 그리움으로 한참을 혹은 스치듯 머물다 지나갔다.
주님, 하고 부르면 나는 가슴이 저민다. 누굴 떠올리다, 어떤 일을 바라다, 혹은 서러움에 주의 이름을 부르다 모든 동기는 사라지고 옹알이하며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아이처럼 나는 자꾸 주의 이름만 부른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부르는 일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일이며 그래서 전엔 알지 못했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어디가 아파서 또는 그리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다 어느새 주님의 마음을, 뜻을, 생각을, 그 의중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게 나는 함부로 굴었다. 누굴 대하고 어디를 가고 무슨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 차마 말로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참 너무했다. 누가, 지금 내 아이가 그러고 있다면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두려움에 치를 떨 것이다. ‘다 그렇지 뭐’ 하기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니. 이제 나의 남은 생이 온전하였으면, 하고 바란다.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갈 데 없는 하루였다. 나의 글방은 골방이다. 하나님 외에 없다. 아침에 일어나 말씀을 펼치고 묵상을 하고 그것을 글로 쓰는 일 외에 나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 그것을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그렇게 몇 번을 읽는 일은 즐겁다. 말씀을 또는 생각을 어찌 그리 끌어냈는가, 때론 낯설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란 고요하여서 어째서 이런 글을 또 읽는가, 싶게 그냥 좋다. 이래도 되나? 싶은 막연함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나를 여기에 이렇게 두신 이를 신뢰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나는 지나간 날을 종종 떠올린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힘을 삼고, 노래를 하고, 그것으로 구원을 삼으려 했던 날들의 고달팠던 일에 대하여는 이제 말하고 싶지 않다. 더는 아쉬움도 후회도 바람도 없다. 미련하여서 이제 남은 나의 미련함으로 주만 바라기를, 나의 힘이시며 노래이시며 구원이심을 놓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렇구나, 내가 어찌 구원의 우물을 긷는지 알겠다. 어쩌다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주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으로 가능하였다. 한참 또 마음이 몸이 나를 못살게 굴 때, ‘아, 그때 그 일에서 주가 나를 어찌 구원하셨는가?’ 생각하는 일은 복되다. 누구 때문에 무엇을 위해 어찌 기를 쓰고 억척을 부리듯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살았었는지. 나는 기쁨을 구원을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 외에 나는 들어앉아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논다. 이 책을 읽다가 저 책을 읽고, 누구를 생각하다가 무엇을 한다. 그 하나하나는 개별적이어서 독립적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산상수훈>을 읽다 김훈의 산문집을 읽었다. 김수영의 산문집을 사고 싶은데 만 팔천 원이나 해서 망설이다 그만뒀다. 누웠다가 앉았다가 그럴 때마다 선풍기의 방향을 바꿔주어야 했다. 아이가 수련회를 잘 다녀왔다고 전화를 하였다. 오후께는 토요무료영화를 보다 접었다.
신기하던데요. 기도할 때 주여, 하고 큰 소리로 부르면서 하는 것도 그렇고, 찬양할 때 춤을 추는 일도 그렇고. 근데 좋았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말씀 묵상하고, 소그룹 소모임도 자주 갖고 성경공부도 하고, 나쁘지 않았어요. 아이의 말도 겅중거리듯 지난 일주일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천안에서 여기까지, 세 시간이 걸려 주일에 오는 게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가까운 교회로 간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하나님이 어찌 개입하시는가,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았다. 어느새 훌쩍 자라 군대도 다녀오고, 모든 게 기특하고 신기하였다.
누굴 생각하고, 무엇을 놓고 기도한다는 일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확실해지는 일이다. 혼자서 이런저런 아룀으로 독백인 것 같은 말이 어느새 하나님의 말을 듣고 있는 게 된다. 아이가 이야기하는 동안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운행하시는가, 손에 잡힐 듯 분명하였다. 내가 못하고 우리 교회가 못해주는 걸, 그렇게 또 학교 기독교 동아리를 통해 역사하시는구나 생각하였다. 미안하다. 뚱딴지같은 내 말에 아니에요, 아이는 머쓱해했다. 미안한 일이 다행한 일이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새삼 아이와 십여 분 통화하는 동안 절감하였다. 이번 주부터는 집에 들어가니까, 다음 주일부터는 갈 수 있을 거예요. 아이의 말에 괜찮다. 그래 그러자. 하고 마음이 가벼웠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주가 이루신다는 것.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다음 주간이 중등부 아이들 시험이라, 아내는 여섯 시나 돼서 수업이 끝났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지만 토요일답게 어슬렁거리듯 산책을 나갔다. 각자 큰 배낭을 지고 몇 가지 식재료를 샀다. 사람들이 많은 마트 안은 부산스러웠다. 딱 질색인데 그것마저 같이 하지 않으면 미안해서, 나는 카트를 끌고 아내 뒤를 따랐다. 주일에 누가 올까? 뭘 할까? 아내는 보채듯 물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장보기 초점이 그리 맞춰졌다. 아내는 주일 날 아이를 만나면 다음 주일에 뭐해줄까? 뭐 먹고 싶니? 하고 묻는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돌아와 비도 오는데 라면을 끓여 저녁으로 먹었다.
주가 다 아신다는 것. 횡설수설할 거 없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그런 것 같다. 기도란 처음에 무엇을 구하느라 한다. 요구사항이 많다. 건강에서부터 사는 일 전반에 대해 아뢰고 구할 게 넘쳐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과 이야기한다. 교제다. 나를 다 아신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누구에게 말한들,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 때쯤 돼서는 하나님밖에 없다. 미주알고주알 할 말이 많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귀를 기울이게 된다. 뭐라 말씀하시는가 하고.
행여 나의 간절함으로 기도하지 말자. 감정이 나의 기도를 주도하지 않게 하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15).”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을, 묘연하여서 그냥 막연하게 구하고 만 것인데도, ‘그것을 얻은 줄로 또한 아느니라.’ 나는 이제 이 말씀을 조금은 알겠다. 뭣도 갖고 싶고 뭣도 되고 싶어서 아뢰고 또 구하지만 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어떠하든 내가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궁색하고 어려워 궁싯거리듯 입을 씰룩거리며 고하고 또 구하지만 실은, 엄마 품이 최고인 아이처럼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이 모양 이대로 주가 받아주신다.
왜 뜬금없이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했을까? 내가 좀 건강하면, 하고 드는 마음 때문에 아내에게 불쑥 안 됐어, 당신. 하고 말하지만, 주가 채우시고 이루시는 것들에 대하여 확신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 그러므로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5).” 오직 우리들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러신 거였구나,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아!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은, 그러느니 내 모든 걸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기를. 그리하여 오직 말씀으로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제는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그러므로 말씀뿐이라.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2-33).” 다른 무엇이 나를 보장할 것인가.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 것인가.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 12:1).”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4).” 주일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히셨다. 말씀을 읽으며 드나드는 생각을 놓아두었다. 두서없이 나의 글이 오갔다. 그럼에도 나의 기도가 또 묵상이 주께 감사하기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5).”
나를 어찌 돌이키셨고, 나의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주관하시는지를.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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