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이사야 13: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2
바벨론에 대한 경고가 실은 듣지도 않는 바벨론을 향한 게 아닐 것이다. 이를 듣고 전하여 스스로 두려워할 줄 알고 각성하는 이는 성도였다.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7-8).”
천안역에서 노숙자들에게 빵을 나눠주는데 그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믿는 학생 가운데 어려운 처지의 이를 돕는 게 더 나을 텐데 말이죠. 아이는 ‘괜한 일’에 대해 투덜거렸다. 그러게. 가끔은 무모하고 빤한 일이어서 괜한 일을 한다, 여겨질 것이 더러 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싶은 자기 생각이 있기도 한데 말이다. 그래도 아이가 그런 데 함께 참여하고 그와 같이 시큰둥하면서도 순종하는 게 기특했다.
먼저는 우리를 위해서다. 다음은 성령이 하신다. 돈만 아깝고 시간만 허비하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성경은 무모한 명령을 내리곤 하신다. 내게 있는 떡을 물 위에 던지라든가,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아무도 모르게 하라든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 6:3).” 돌려받을 수 없는 상대를 구제하라는 것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라는 것.
예배가 시작되고도 한참 뒤에 아이가 왔다. 천안에서 오는 길이라 기특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불쑥 아침에 일어나 오게 됐다고 했는데, 전날에 같이 통화할 때 그리 마음먹었으면 좋았을 걸. 아이는 방학을 맞아 자취를 접고 집에 들어가는 거였다. 그런데 가족을 만나는 일에 시큰둥하였다.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의 반목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 역시 주의 마음으로 다가갈 것을 일렀다.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그래봐야 소용없는 걸 하나님이 몰라서 그처럼 무모하신 걸까? “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사 13:2).” 민둥산처럼 도무지 희망에 없어 보이는 곳에 기치를 세우라니. 그냥 내버려둬야 할 땅에서 목표를 세우고 기를 꽂은들. 그런 그들을 부르고 손을 흔들어 그들로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할 수 있을까? 실질적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모처럼 아버지한테 목욕탕에 가자고 해봐. 아니면 같이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고 해보든가. 그냥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럴 때, 주의 마음으로 해봐.
아이에게 부모는 민둥산이다. 천안역에서 노숙자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주는 일보다 무모하다. 서로 바쁘다는 자기 영역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말도 안 되는 걸 그냥 말씀하셨을 리 없다. 저들을 위해 애곡해야 한다.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손의 힘이 풀리고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사 13:6-7).”
그럴 수 있고 그럴 나이였다. 불편하고 어색한 정도를 넘어 말해봐야 뭐하나 싶은 보이지 않는 벽이 너무 오래 전부터 두터웠다. 두 달 남짓, 방학 동안에 집에 있어야 할 게 갑갑했다. 비가 많이 올 거라고 해서 우린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았고, 밖에서 점심을 먹고도 아이는 뭉그적거리며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같이 올라와 차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왜 교회는 무모해야 하는지. 우리의 무모함이 왜 말씀의 명령인지. 그럴 때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나누었다.
그러게. 말씀대로 산다는 일은 저들 눈으로 보면 미련한 일이었다. 왜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도대체 민둥산에 기치를 세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두서없이 나누었던 우리의 이야기가 오늘 아침 말씀으로 더욱 선명한 것 같다. “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사 13:2).” 그런 열심을 차라리 될성부른 나무에 쏟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는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불러 나의 노여움을 전하게 하였느니라(3).” 무모하고 어이없는 일에 순종하는 사람이 ‘거룩하게 구별한 자’이다. 주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다. 그리하여 삶에서 주의 노여움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이때, 주가 하신다. “산에서 무리의 소리가 남이여 많은 백성의 소리 같으니 곧 열국 민족이 함께 모여 떠드는 소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심이로다(4).”
나도 예전에 그와 같은 무모함에 혀를 내두르고 비난하고 경멸했다. 자신들도 먹을 게 없으면서 노인들에게 얼마씩 돈을 나눠주며 교회에 오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들은 그저 그 돈을 위해 알아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예배에 말씀에 앉았다가 또 부리나케 다른 교회로 달려가 얼마쯤 적선이나 받으려 할 텐데. 큰 교회야 여유가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월세도 퍽퍽하니 목회자 살림도 빈궁한 처지에 이 무슨 무모함인가 싶었다.
아이에게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다 새삼 내가 얼마나 못되게 상처를 주었나,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다. 되바라진 소리로 한심해하며 손가락질을 했었으니까 말이다. 며칠 전 옆 사무실 사장이 왔다가 그럼 수입은 어떻게 하냐? 월세나 관리비는 감당이 되냐? 하며 나를 경멸하듯 혀를 끌끌 차던 게 생각났다. 지 코가 석 자면서 누가 누굴 위한다고, 싶은 것이다. 아이에게 겅중거리듯 들려주던 말 가운데서 하나님은 나의 어리석었던 지난날을 마주하게 하셨다.
그래봐야 뭐해요? 아이의 반문이 내 것이었다. 주가 일깨우시기 전에는 도대체가 납득이 안 가는 일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렇지 않고는 예수님처럼 어줍고 한심한 위인이 또 있을까? 무모하고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 수긍을 할 수 있을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용사라는 걸 말이다.
한 농부에게 그저 그 밭은 노동의 현장이었을 뿐인데, 저가 그 밭에 금은보화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전혀 다른, 별개의 현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그 마음, 예수의 마음이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그러라고, 그러자고 민둥산에 기치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2).” 나의 부끄러움이 어느 훗날 아이의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지금 생각하였던 그 무모함이, 그 무모함을 들어 하나님이 어찌 일하셨는지를 목격하게 하실 것이다. 모르겠다. 아이가 돌아가서 정말 먼저 모처럼 아버지께 혹은 가족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간단한 스킨십이라도 했는지. 엄마, 하고 손을 내밀라고 했더니 기겁을 했다. 그 골 깊은 가운데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이 얼마나 외로울까.
우리는 상식의 세계를 사는 게 아니라 계시의 세계를 사는 이들이다. 우리는 지적 호기심에 주를 바라는 게 아니라 의지적인 순종으로 주를 섬긴다. 이해는 안 되지만 때론 믿어지지도 않지만, 무모하고 미련해보여도 말씀이 그리 이끄심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따를 것인지, 한사코 외면하며 논리와 상식을 들어 판단할 것인지. 당장 오늘 내일 알바를 구해야 한다고 바쁘다는 아이에게 시간을 내어 좀 오라고 하였다. 나 역시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다. 나야말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한심하기까지 하여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상식의 세계를 살 것인가, 계시의 세계를 살 것인가. 나의 판단과 이성을 따를 것인가, 말씀이 이르시는 바를 취할 것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주께서 내게 분별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그리하여 예수 안에서 실제인 삶을 살게 하시기를. 그저 모호하고 막연한 마음이 아니라,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 3:14).” 다른 길은 무의미하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15).” 나는 다시금 말씀을 강조하며 부디 하루에 한 구절이라도 묵상하기를 권하였다. 기도도 좋고 찬송도 좋지만, 나의 간절함이 기도가 되지 않기를. 감미로운 찬송이 나의 마음을 위로하는 게 아니기를. 오직 주님만,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이에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2).”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걸. 그리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불러 나의 노여움을 전하게 하였느니라(사 13:3).” 주가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사명이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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