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이사야 15: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편 4:1, 8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언 4:18-19
정말 너무하다, 싶게 사람들 참 그렇다. 일부러 그런 사람만 고르는가. 청문회에 나온 이들은 하나같이 안타까울밖에, 어찌 흠결이 없는 인생이 있겠나만. 창원 골프장 살인사건 용의자 둘이 붙잡혔는데 안 그랬다고 발뺌이다. 몰랐다. 모른다. 아니다. 재판을 받고 있으면서 한사코 외면하고 부정하는 이들도 그렇고. 문득 어느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였다. 그때의 아우성이 귀에 쟁쟁하였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시 4:2).”
롯의 후손 모합에 대한 경고다.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사 15:1).” 곧 죽을 날을 받아놓은 나이에도 저마다 사욕을 부리는 데 희한하다. 그쯤 되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언제까지 욕되게 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이를 보면서 우리는 저절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자신만이 아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복되다. 차마 누구에게 말로 할 수 없는 곤란에 대하여, 은혜를 베푸신 주의 긍휼하심 앞에 감사를 올려드리며,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1, 8).”
곧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그런 거였다. 요지경 세상에서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을 목격한다. 하긴 사랑에 빠진 사람과 죄책에 빠진 사람은 겉으로 볼 때 똑같다. 저절로 그리되는 마음의 이치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저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일부러 꾸며 거짓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왜 나쁜지, 뭐가 잘못인지, 그래서 나는 그런 적이 없다, 하는 것이겠다.
들어앉아 책을 읽거나 빈둥거리는 게 일인데도 더위로 힘든 하루였다. 중등부 아이들이 오늘 내일 시험이라,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읽었다. 선풍기 바람이 헐거워 뜨거운 바람을 냈다. ‘오직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사람들.’ 쉽게, 그리스도인은 그런 자였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나는 어떤가 생각하였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은 강한데 실제는 어림없어 송구했다. 나는 죽는 게 무섭다. 여든을 훌쩍 넘긴 이가 여러 말 가운데 말했다. 어디 사우나가 좋다며 80도 넘는 고온이라는 말에 저가 한 말이었다. 그러자 누가 묻기나 한 것처럼 죽는 일에 대하여 설왕설래 말이 오갔다. 다들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외면하고 살았을 뿐인데, 더는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서부터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해 더는 태연하게 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어떤가. 나의 관심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인지 생각하였다.
거듭났다는 처음 증거는 갈등일 것이다. 전에는 괜찮았던 게 왜 자꾸 거슬리고 부당하여 꺼려지는가, 하고 어렵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비로소 그 싸움을 알겠는 거다. 전엔 그게 뭐든 무슨 상관이나 있었겠나. 저들이 알지 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전혀 새로운 걸 아는 게 된다. 그래서 슬퍼하는 일과 기뻐하는 일이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너무 더워서 소파에 누워 <라이프>를 봤다. 우주 생명체의 진화 과정이 그려졌다.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악을 더한다. 악은 지극히 개별적이어서, 살기 위한 것일 때 악과 선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할 때는 아직 당사자가 아니라는 소리다. 무엇으로 기뻐하고 슬퍼하나, 그 기준이 왜 중요한지 생각하였다. 내가 의롭고 내가 선하고자 하는 일은 악의 또 다른 면일 수도 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그러므로 주를 바라게 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3).” 주가 택하셨고 그리하여 내가 부를 때에 주가 들으신다. 이를 알 때 두려워해야 할 게 무엇인지 확실해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리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뿌리가 더 깊이 내리는 동안 일상은 평범하여서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하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 나를 보고는 큰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다. 어? 하고 또 다른 녀석이 싱겁게 뛰어와 아는 체를 했다. 엄마가 밤마다 돈 때문에 ‘화장을 짙게 하고’ 출근을 하는 바람에 횡단보도를 건너 이모네 집으로 가서 자는 아이다. 뭐라도 있으면 좀 주겠는데, 하필 주머니에 사탕도 없었다. 그래, 내일 보자. 하고 인사를 하고 나는 주의 이름을 불렀다.
아래층 아이엄마가 퇴원을 했다. 이혼한 남자가 아이를 데려가서 돌려보내려 하지 않는다. 아이도 올 마음이 없다고 한다며, 여자는 매일 술에 절에 있다. 지나치듯 인사를 할 때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여 진동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는 마침 기억났다는 듯 아이엄마 이야기를 하다 한숨을 찼다.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들을 곁에 두시고 하나님은 대체 우리더러 어쩌라는 것일까? 두부가게 둘째 딸이 시험을 잘 봤다며 덩실덩실 좋아했다.
잠언의 말씀은 이를 함축한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예수가 제일이니 예수만 얻으라.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도 예수를 얻으라. 그렇게 들린다.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과 사건과 처한 상황에서 예수를 바라본다. 가난한 동네의 아이들이 가난으로 피폐한 부모들 밑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엄마를 모르고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는 한여름인데도 털옷을 입고 나와서 놀았다. 안 더워? 하고 묻자 부드러워서요, 하고 대답했다.
내 마음에 들락거리는 것을 지켜야 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자꾸 부딪치게 하신다. 그러면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러느라 마음 상하게도 하신다. 그래서 안타깝게 하시고 그래서 한 번 더 친절할 수 있게 하신다. 성령이 가르치실 것이다. 생각나게 하신다.
뭘 해야 하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도 주가 인도하실 것이란 소원이 있다. 이 소망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거룩은 내가 임의로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주를 바람으로 그 마음이 고요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럴 때 내 안에 두시는 소망이 있다. 이를 두고 누가 묻거든 항상 대답할 말을 준비하는 삶. 이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는 선한 양심의 일이다. 내가 나조차 어쩔 수 없다는 상황이 때로는 온유하게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내 안에 뿌리가 깊어지는 동안 열매는커녕 아무런 변화조차 없었다. 여기서 뭐하나, 싶게. 한데 그러는 동안 내가 더욱 주를 바람이었다. 그래서 더 주 없이는 안 되는 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순진하여서 저들 눈엔 나의 온전치 못한 육신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뭘 그렇게 자꾸 준다.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호기심에 친밀함을 더한다. 늘 기도하기를, 내게 보이는 것을 저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듣는 것을 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러라고 내게 연약함을 주셨는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나의 약함이 나를 강하게 하신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힘들어하다가도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는 내게 은혜이구나, 생각하였다. 그저 나의 최선을 주께 드리는 게 예배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단순하게도 아주 단순하여서 나는 그저 연약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하여 나의 사소함으로 아이들을 또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도 말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렇구나. 그래서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24).” 공연한 아쉬움과 불만이 나의 영혼을 상하게 할 뿐이다. 그럴 거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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