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이사야 14:24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시편 3:3-4
도로 중앙화단을 없애고 공간을 넓혀 주차공간을 확보하려는 쪽과 이를 결사반대 한다는 인근 아파트 주민간의 마찰이 생긴 모양이다. 평소 늘 너무하다 싶게 무질서한 주차 차량으로 인해 도로는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모든 사안마다 이쪽과 저쪽이 갈려 자기의 주장을 점철시키려 기를 쓰는 게 사회다. 대화와 타협을 내세우지만 이익과 손해만이 배분의 원칙을 대신하는 것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간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을 때 초연할 수 있다. 주님은 그럴 수 있는 모범으로 새와 들의 백합꽃을 제시하였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28).”
새는 눕지 않는다. 부지런하여도 그 날갯짓을 위해 깃털을 만들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모든 들풀은 심겨진 자리에서 자란다. 의식적인 노력이 아니라 주신 이에 대한 신뢰로 말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멈춰선 포클레인을 지나 결사반대 현수막 밑을 지나오면서 의연하였다. 굳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모든 일에서 그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였다. 서로는 나름의 계산과 원칙과 손익분기점을 사이에 두고 다툰다. 새는 자유롭게 그 위를 난다. 들풀은 파헤치다 만 중앙 녹지에서도 여전히 푸르렀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먹고 사는 일은 숭고하다. 그리하여 노동은 예배다. 한데 노동이 예배는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린 그렇게 온전하지 못하다. 이문을 내고 싶고 수고의 대가를 바라게 돼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말씀은 지엄하였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보다 우선하는 게 있다. 목숨보다도 말이다. 우리에게 두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 그것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고 어떻게 살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일이다.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주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오전에 출애굽기 32장을 읽으면서 새삼 우리 사람의 어쩔 수 없음을 생각하였다. 모세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는 묘연하였다. 더디다는 것,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 당장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다가 번번이 그게 나였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염려와 근심이 근거였다. 혹시 ‘나의’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7).” 자기만족에 겨운 하나님을 말이다. 그랬구나. 그럴 수 있었구나. 그러기 십상이었구나. 내가 원하는 형상, 나의 노력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나의 기도, 나의 헌신, 나의 희생 그리하여 ‘나의’ 만족으로 하나님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기도는 나의 간절함을 우선하였다. 헌신은 어떤 만족을 추구하였고, 희생은 그에 따른 보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자니 살면서 사람들만 못할 때 원망이 앞선다. 이러려고 애굽에서 나를 이끌어냈는가, 싶은 것이다. 하는 일이 잘 되고 바라는 일이 척척 풀릴 때 하나님은 역시 좋으신 하나님이다. 남들처럼 아니 남부럽지 않게 사는 일을 축복의 기준으로 삼고 말이다. 이는 모두 금송아지가 아니었던가.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행 7:41).” 이를 뭐라 하면 들릴 리 없다. 같은 하나님이라도 다르게 바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우상일 따름이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취하고 다스려 내가 기도하고 내가 찬송하는 대상으로의 금송아지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출 32:4).” 이 말씀을 읽는데 소름이 돋았다.
행여 나는 그러하지 않은가. 그럼 이 우상을 깨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하나님이 하신다. 내 안의 그리스도가 하신다. 성령이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하여 주의 백성이 된다는 건 그의 치리와 법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내 안에 소원을 두시는 이, 그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하시게 하는 것. 곧 주의 이끄심을 바라는 일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그 증거로 내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그러니까 저절로 그리 되는 일인데, 이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고 먹고 사는 문제도 아니었다. 말씀을 사모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성경을 읽다 옆에 메모해둔 성경구절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메모하였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 마태복음 6장 25절부터 34절. 옆에 ‘의연하고 단순한 사람이 되자.’ 하고 적었다. 어설프면 참견한다. 누굴 비판하고 판단하여 저를 응징하고 싶어 한다. 문득 뉴스를 보다, 마음의 어떤 분쟁을 알고, 누가 왜 또 교회를 멀리하는지를 듣고,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듯 냉소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비판은 사랑이 부패한 것이다. 분별력을 주신다는 건 그만큼 막중한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일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때, 저를 비판하고 결론지으려는 마음이 동시에 들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재판장으로 세웠나? 그래서 주께 분별력을 구할 때 주의해야 하는 일이었다.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기도해야 할 의무다. 저를 판단하지 않을 자제력을 동시에 부여받아야 한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누굴 보고 무슨 일에 대하여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은 그에 따른 막중한 기도의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성품이 계속 나타날 수 있도록,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아! 이처럼 성경이 인도하는 덴 그저 놀라움만 넘친다. 그래서 내 믿음에 덕을 입혀야 하는구나. 어느 위인이 아니라 바른 지식으로 절제에 따른 인내와 경건을 도모하는 데 있어 형제 사랑하기를 더해야 한다.
결론은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일이었다. 주가 아니시면 나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그저 나의 인애라는 건 이슬같이 허망하여서 아침에 묵상글을 쓰며 다짐하였던 마음이 돌아서면서 금세 근심과 염려로 좀 먹는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 6:4).”
저녁에 들어오면서 나는 누나에게서 들은 ‘해독주스’ 재료를 샀다. 당근, 브로콜리, 토마토, 양배추를 삶아서 식혔다가 바나나와 같이 갈아 아내에게 주었다. 갱년기가 오면서 아내는 몸의 변화에 힘들어하고 있다. 딸애는 퇴근하고 들어오면서 조그마한 케이크를 사들고 왔다. 새로운 여성성이 되는 기념이었다. 문득 딸애가 처음 생리를 시작하던 초등학교 6학년 때가 생각났다. 아내의 귀띔으로 나는 그날 저녁 장미와 케이크를 사들고 왔었다. 훌쩍 시간이 흘러 아내는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 18:22).” 그러므로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5:18).”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주가 이루신 오늘의 나의 삶을 감사로 살아드리는 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시 3:3-4).”
곧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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