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전봉석 2017. 7. 6. 07:43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

이사야 16:12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편 5:7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에게 순복하라는 것. 그런데 그게 되나. ‘자기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고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한다. 한다고 하는데 그 하는 게 소용이 없구나. 아!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러게. 연습한다고 성도가 되는 건 아니었다. 마음을 기울여 애써 훈련한다고 주의 뜻에 굴복할 수 없다. 도를 닦고 무던히 수고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닌 것이다.

 

마치 우리의 재능을 드리고, 내가 어디서 어떻게 순종하여 주를 섬기겠다고 하는 소리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겠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주를 사랑하는 것. 나의 자아실현이 아니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나는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지금 처한 상황에서 형편과 사정에 따라 있는 대로 짊어지고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이는 아직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을 때 힘에 겹도록 짊어진 보따리였다. 그럼에도 묵묵히 따르는 게 대견하긴 한데 그러자니 그게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웠던지.

 

내려놓는다는 건 더 이상 옛 생활을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러한데도 살면서 드는 생각은 언제나 매순간이 선택이었다. 바라바인가, 예수인가.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마 27:17).”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바라바를 요구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자기 산당에서 또는 자기 성소에서 찾고 드려지는 종교적인 신념이 얼마나 우리를 속여 넘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저마다 억울한 게 많겠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안다고 여겨 애쓴다고 수고하며 만족함을 누렸는데.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아찔하다. 얼마나 생각 없이 자중하지 못하고 바라바를 요구하며 살았는가. 예수보다는 바라바다. 사는 데 따른 부담이 덜하고 그때마다 나의 생각에 가까운 걸 추구하는 데 있어, 뭔가 보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성과도 거두고 적당히 만족함도 얻으면서 말이다. 과연 나는 예수인가, 종교적인 나 자신인가. 이때 바울은 그 답을 제시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일.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면서 나의 재능을 따지고 이를 달란트라 운운하며 보내시는 자리가 아니라 가고 싶은 자리를 선호하는 일. 애들도 있고, 몸은 여의치 않고, 저들이 원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를 주가 보내시는 자리로 둔갑시키려는 건 아닐까?

 

같은 층에 있는 교회의 젊은 목사를 만났다. 바쁘시죠? 하는 물음에 나는 머쓱했다. 바쁘시죠? 하고 내가 묻자, 늘 할 일이 많은 저의 일상이 그려졌다. 바쁜 게 좋지요, 하고 말하다가 정말 바쁜 게 좋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아 이 현대 사회에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씀이 아닐까? 누가 요즘 십자가를 바란다고. 십자가도 이젠 패션일 뿐인데. 십자가는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는 액세서리 정도에서 바라바가 된 지 오래다. 세상이란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이다. 세상인가 그리스도인가. 바라바인가 예수인가. 이와 같은 질문이 오후 내내 머리에 남았다. 내가 원하는 바라바가 얼마나 교묘하게 예수를 대신하고 있는지.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소 귀에 경 읽듯, 일요일에 나와. 우리 같이 예배드리고 밥 먹자 하고 말했다.

 

요령도 없고 돌려 말하지도 않았다. 새로 온 아이가 뜬금없다는 듯, 왜요? 하고 묻자 여태 공들여 마음에 두고 있던 녀석이, 여기 교회잖아. 여기서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그것도 몰랐냐는 듯 나의 설명을 대신했다. 요것 봐라.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수업을 올 때면 녀석은 내 것까지 뭘 꼭 사들고 온다. 녀석이 싫은데 밉지 않고 그 엄마가 얄미운데 안됐다. 나는 이 묘한 감정을 때로 낯설어한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아야 하는데 싫고도 좋은 것이다. 늘 안으로 목소리가 감기고 울고 싶은 아이처럼 할 말이 많은. 내 말이 맞죠?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볼 때는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데….

 

주가 주시는 마음이 때로는 풀기 어려운 숙제 같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그 애 얘길 했더니 아내는 입을 삐쭉거리며 혀를 찼다. 이제 교육비는 아예 안 내기로 한 모양이야. 뻔뻔해. 그러면서 아이 신발이랑 가방은 전부 십만 원이 넘는 거 있지? 하며 볼멘소릴 하였다. 어쩌겠나. 그래도 줄 게 있는 것보다 받을 게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얘가 좋아라하니까 그냥 그러려니 해. 뭐라 길게 말해봐야 내 속이 그 속이었다. 감사한 건 중등부 아이들이 모두 시험을 잘 본 모양이었다. 신이 나서 누가 몇 개 틀렸고, 누군 무려 몇 점이 올랐는지를 아내는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다 문득 보면 우리가 하는 것보다 그 이상의 성과를 더하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수순을 밟게도 하시면서. 그럴 때면, 이게 그러니까 내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닌 것이다. 아이를 대하는 일에 있어서도 유난히 마음을 쓰고 공들였다 싶으면 뻐그러지기 일쑤고 오히려 그 곁에 조금은 등한시하고 내버려둔 아이가 달리 변한다. 어찌 능히 주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피곤하도록 봉사하고 나아가 기도한들, 그게 자기 만족인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사 16:12).” 우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먼저는 주의 사랑을 덧입었다는 걸, 그렇지 않고는 이처럼 주의 이름으로 씨름하게 하실 리 없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주의 성전’을 향해 예배하는 자라는 것.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잠 5:21).”

 

내 아무리 용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들어 사용하지 않으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어지러울 때면 문득 붙드는 말씀이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건 예수께서 가지셨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나도 갖는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예수님이 성경의 문맥이고 주제어이며, 묘사와 진술과 설명이시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 실은 주님이 나를 대하시는 일과 다를 바 없어야 하고, 이때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할 때 주님도 그러셨을 걸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이제는 안다. 그래서 혹시 또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요구하며 원하는 건 아닌지.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그리하여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말씀 붙들고 말씀만을 가지고 주신 한 날의 생의 다할 수 있기를. 하여 오직 주만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후 1:8-9).”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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