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전봉석 2017. 7. 7. 06:40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17:6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6:9

 

 

 

낮 동안 더위로 인해 시달려서 그런가, 요즘은 초저녁에 일찍 잠이 든다. 혼곤한 잠이다. 꿈을 꾸었고 누군가를 만났는데 잠결에도 그리움이 사무쳐 눈을 떴다. 너무 이른 시각이다. 좀 더 잠들고 싶었지만 다시 이룰 수 없어 일어났다. 아이의 블러그에 들어가 독후감을 읽었다. 우연처럼 친구 하나가 카톡에 생성됐다. 멀리 미국에 나가서 사는 친구였다. 시간이 저쪽은 얼추 저녁일 거라, 몇 줄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었다.

 

조용히 당근과 브로콜리와 양파와 토마토, 양배추를 삶았다.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려고 그렇게 후텁지근했던 모양이다. 말씀 붙들고 살자. 친구에게 마지막에 한 인사다. 부쩍 다른 방도가 없다는 데 절감한다. 혼탁한 사회다. 전쟁의 불씨가 살아있고, 사람들의 안이함은 극에 달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입에 욕을 달고 있다. 어른들은 화가 가득하다. 저마다 사느라 진이 빠진 듯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사업은 잘 되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말씀 붙들고 살자.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는 듯하여서 말이다.

 

멸망에 대한 경고다.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아람도 앗수르도 멸망한다. ‘그날’이 온다. 천 년 만 년 이어질 것 같던 창대함은 부질없다. 나는 다윗의 기도를 되뇐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1-2).” 주를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많이 늙었지, 뭐. 친구의 말에 뭉클했다. 하긴 지금 아들애 나이 때 내가 결혼을 했다. 겁 없이 살았다. 돌아보면 뼈가 떨린다.

 

주의 긍휼하심이라.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17:6).” 다 소용없이 그대로 버려져도 그만이었을 텐데, 주는 나에게 은총을 더하셨다. 그 안에 주울 것을 남기시고, 이처럼 남은 생을 주께 향하게 하신 게 큰 은혜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든 게 감사할 따름이다.

 

레위기를 읽으며 우리의 잃어버린 거룩을 생각하였다. 동성애에 근친상간은 물론 소아성애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거룩이란 묘연한 일이 되었다. 거룩에는 잘라내다, 구별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멋진 표현인 것 같지만 잔인할 정도로 아픈 단어다. 교회를 일컫는 에클레시아도 불러내다는 뜻이다. 세상에 사는데 세상에서 불러내는 삶이란 게 세상에서 볼 때 얼마나 미련하고 잔인한 일인가. 거룩이란 잘 벼린 칼날처럼 두렵다. 함부로 거룩을 운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0:7).”

 

이는 오늘 잠언의 말씀에서처럼 다급한 소리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잠 6:5).” 어슬렁거릴 시간이 없다. 막연하여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영적인 본능으로 후다닥 놀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는, 한데 지니고 사는 게 너무 많아서 둔하다. 다 내려놓자니 걸리는 게 너무 많다. 구원을 마치 프리패스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본구원으로 족한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물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값없이 거저주신 것이나 그래서 가치도 공짜가 아니다. 귀한 건 귀하게 다룰 때 진가가 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막연하여서 긴가민가하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설마, 하는 방심은 선물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 값은 하나님이 어린아이로 태어나신 일이고, 죄 없으신 이가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한 값이다. 결코 공짜로 주어진 게 아니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바울 사도의 간곡어법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시게 하기 위해, 주께 나의 모든 걸 내어드려야 한다. 모든 것, 그러므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그럴 수 있는 게 선물을 선물로 받은 자의 증거였다. 어떠하든 주는 선하시다는 것. 주님에 대해 믿는 게 아니라 주를 믿는 것.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게 아니라 주를 바라는 것.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건 믿는다는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믿는다는 걸 무슨 취향이나 선호의 문제로 여기는 데는 할 말이 없다. 답답한 노릇이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내가 주의 일을 한다는 건, 주를 믿는 일이다. 주를 믿는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지경에도 굳건하게 말씀을 붙드는 일이다. 말씀 붙들고 살자.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를 담았다. 하나님을 믿으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헛된 믿음을 심어주는 시대다. 너무 적당하여서 안 믿는 거나 믿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데 주께서 나를 죽이시더라도 주의 선하심을 믿는다는 욥의 고백이 과연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래도 내가 주께 아뢰는 삶으로 사는 일. 믿는 게 주의 일이다. 너무 더워서 하루가 죽을 맛이다. 생각 같지 않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과여서 난감하다. 아이들을 대하는 일에서도 이게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믿는 게 일이다.

 

나의 모든 걸 주께 거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그럴 수 있는 게 믿음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러다 보니 그러고 있었다는 걸 느낀다.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하지만, 나는 늘 설교 원고를 염두에 둔다. 하루 전에는 본문을 살피고 그 의미를 찾아 초안을 잡는다. 그 전날에는 읽었던 책과 그 성경구절에 밑줄을 긋고 근거 말씀으로 삼는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러고 있었다. 달리 할 게 없는 사람이라, 나는 아침에 일어나 묵상 글을 쓰는 일에 전심을 다한다. 그러기 위해 전날에 읽은 책을 꼼꼼히 메모한다. 아무 책이나 볼 수도 없다. 여느 소설이나 누구 수필에서보다 말씀을 붙들고 씨름했던 사람들의 글이 도움이 된다. 메모할 게 많다는 건 나도 그러고 싶다는 강한 열망의 흔적이다. 그렇다는 것이지 그다지 그러고 살지는 못한다. 드나드는 생각이 불순하고 원망과 짜증이 언제나 나를 주도하는 것 같다. 거기서 드는 혐오를 나는 주체할 수 없다.

 

중학교 아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어렵게 시험도 끝마쳤으니, 아내는 떡볶이와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왔다. 응원하고 격려하는 게 일이다. 두 자매는 앙숙이다. 누가 있든 없든 서로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감정의 골이 깊었다. 어쩌나. 내가 아직 뭐라 할 게 아니어서 주의 도우심을 바랐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나는 식사기도를 길게 하였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할 수 있는 걸 하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마음에 근심할 일이 아니다. 믿는다는 일, 이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6:47).” 영생은 주의 생명이다. 나에게 주신 것이다. 믿음이란 이 생명을 갖는 것이다.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그러니 말씀 붙드는 일 말고 다른 더 좋은 수가 있나?

 

내게 주신 은사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내가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도 없고, 두 자매의 앙금 깊은 갈등을 해결할 수도 없으며, 믿음을 취향으로 여기는 이에게 그건 아니라고 설득할 수도 없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는 것만큼이나 주를 아는 일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도 안다. 이를 어찌 얻은 선물인데 안이하게 굴 수 있겠나.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행여 내가 거룩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섣불리 누굴 탓하려는 것도 아니다. 공연히 나는 뭔가 그리스도인답게 잘 살고 있다고 내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지 못해서,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번번이 드는 좌절과 실망을 딛고 주를 바라는 수밖에…. 설교를 위해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게 아니고, 누구에게 들려주려고 말씀을 다루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 그러는 동안 내 안에 드는 주를 바람이 더욱 간절하여지기를.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내가 살기 위해 나는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묵상 글을 쓰고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 내가 죽겠으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처럼 말씀 붙들고 살아갔던 이들의 글을 섭렵한다. 마치 누굴 위해 대단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이어서가 아니라, 그래도 나는 염치가 없어서 송구하고 답답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 교회와 한 영혼을 위해… 라는 말이 나에게는 얼마나 부끄럽기만 한지 모르겠다.

 

주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어서, 나 하나 주 앞에 온전히 서는 일도 감당이 안 되는 위인이라.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 6:9).” 곧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7).”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41:12).”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이를 알면 알수록 주를 더욱 바라는 수밖에.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다른 길은 모르겠다. 오직 말씀 붙들고 살자. 그리하여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