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이사야 19:1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숨이 가빠서 병원에 갔다. 심전도검사와 엑스레이를 찍었다. 뚜렷한 원인이 없었다. 우선 약을 처방해주어서 먹고, 다음 주 화요일에 종합검진을 하기로 했다. 아내가 같이 나와 점심을 먹었다. 몹시도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글방으로 올라와 나는 소파에 누워 책을 보다 토요무료영화 <특별시민>을 보았다. 아내는 아이들 여름방학 교재를 선택하고, 아이들과 카톡을 하고 통화를 하느라 바빴다. 오후께 좀 나아져 산책을 갔다.
일상은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덤덤하였다. 찌릿, 하고 무릎이 아프더니 그걸 신호로 온 몸이 쑤시고 결렸다. 돌아와 온 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누웠다. 진통제를 먹기에는 또 속이 뒤집어질까봐 조심스러웠다. 별 생각이 다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구하였다. 더, 좀 더 어려워져도 주께 향한 마음이 온전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아파서 주를 외면할까 두려웠다. 원망이 나를 지배할까봐서 말이다. 하필 다시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한 책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나는 가끔 하나님의 사랑이 아이러니하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만큼 아이러니한 건 없는 것 같다. 이게 어떻게 사랑이냐? 하는 마음이 드는데도 이게 사랑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아내는 한 아이를 두고 놀라워했다. 이번 시험을 끝으로 아이는 못 올 거였다. 그 애 엄만 성적이 떨어지면 바로 다른 델 보내는 식이니까! 한데 아내도 포기를 했는데 아이는 아내와 공부하는 과목만 90점을 훨씬 넘긴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게 아니면 이게 말이 안 돼! 신이 나서 아내는 말했다.
은혜는 어느 순간이 아니라 매순간이며 지금이다. 감사는 결과가 아니라 놀라움이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나는 아픈 몸을 달래면서 두려웠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9).”
오늘 말씀은 내가 그처럼 의지하려 했던 세상, “애굽에 관한 경고라.” 얼마나 저를 바라고 부러워하며 살았던가.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사 19:1).” 건성으로 영화를 보다 ‘정말 이 정도일까?’ 하고 혀를 내찼다. 이게 오늘이지 않나.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의 계획을 내가 깨뜨리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2-3).”
나는 과연 주를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을까? 내가 최선을 다해서가 아니라 주가 나에게 최선을 다하신다는 사실을 놓지 않고 설 수 있을까? 만약 이 무릎마저 사용하기 어려우면, 농담처럼 주고받던 전동휠체어를 타야 할지도 모르는데. 생각은 저 혼자 들락거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반 아이 네 명이 장애아였다. 한 아이는 아침에 아이엄마가 휠체어를 밀어서 학교에 데려오면 끝나고 우리가 밀어서 집에 데려다 주었다. 문제는 화장실이어서 소변은 ‘원기소통’에 보면 우리가 가져다 비웠는데 큰 건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한 번은 쉬는 시간에 우리도 노느라 정신이 팔려 녀석이 소변을 본 걸 몰랐다. 수업종이 치고, 어디서 자꾸 지린내가 난다 싶었더니 녀석의 원기소통이 넘친 것이다.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와중에 특히 계집아이들이 뭐라 해서 말싸움이 붙었던 기억이 난다. 글쎄. 참 서러웠던 기억이다. 늘 사이가 좋았던 게 아니어서 어떤 날엔 서로 집에 데려주기 싫어서 대놓고 구박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 담임선생 별명이 ‘불곰’이라 무서웠던 것 같다.
어디가 아프다는 건 본의 아니게도 본의 아닌 마음이 일이 자꾸 생겨난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나는 이 말씀의 서러움을 안다. 그러느라 겪었을 고통에 대하여는 누구도 추측할 수 없겠다. 그런데 바울의 감사는 신비하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1).” 그래서 자족을 배웠다니.
그리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다시 말하면, 능력 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소리가 된다. 아!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감사가 은혜다. 은혜와 감사가 별개일 없었다.
조건이 아니고 어떤 결과도 아니다. 감사가 되는 게 은혜고 은혜를 누리는 게 감사다. 약한 데서 도리어 크게 기뻐한다는 건 철저하게 허풍이거나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어떤 신비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력이 머문다. 내 능력이 아니다. 고로 내가 원망할까봐, 감사하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것은 순전히 나에 대한 오해다. 당연히 나는 못한다. 아프면 아픈 거지 아픈데 안 아프다고 하는 게 능력이 아니다. 완벽한 신뢰란 주셔야 할 거였다.
주셔도 받지 못하는 바에는 그게 천국이어도 감사는 묘연하다. 얼빠진 몽상가가 아닌 다음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이를 어디서 알 수 있을까? 풍족함이 아닌 연약함에서, 건강함이 아닌 나약함에서, 즐거움이 아닌 서러움에서 더욱 선명할 거였다. 내가 어두울 때 주의 빛은 더욱 강렬하다.
아픔을 예찬하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그런 류의 영화를 보고나면 이제 나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들? 하고 되묻게 되는 것이다. 자기만족에 겨워 악을 악이라 칭하지 못하고 당장의 만족과 위안을 얻고자 하여 거짓이 난무하고 남을 해코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데, 애굽은 그런 곳이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구하던 세상은 그러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내가 어떠냐가 아니라 주가 왜 그러시느냐 하는, 주를 신뢰한다는 건 내가 주를 이해하려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주께 이해를 구하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주는 선하시다는 것을 붙드는 일. 곧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나는 그 영화와 존귀의 관을 나로 하여금 주를 신뢰하게 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내가 하는 게 아니라 그리 되게 하시는, 이 신비한 마음을 말이다. 구슬프고 서럽고, 어떤 절망이 또 고통이 나를 억누른다 해도 그래서 주를 바라는 마음이 신비한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런 나를 싫증내지 않고 안타까워하며 돌보는 아내의 마음도 신비하고, 또한 적당하여서 이처럼 말씀 앞에서 ‘아직은’ 감사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도 신비하다. 이러다 내일이 주일인데 어쩌지? 하는 염려로 잠을 재촉하던 마음이 머쓱해졌으니 말이다.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시게 나를 주께 내어드리는 일, 완벽한 신뢰란 실은 별 거 아니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내가 주 앞에 가만히 있어 드리는 일. 옹졸하여 금세 또 서러움이 염려가 불안이 나를 엄습한다 해도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시는 이 놀라운, 신비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 아침,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기를 이처럼 간절히 바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 참 멀고 지난했던 세월 중에 어느 한 순간이 주의 은혜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 세 명은 그 한 친구의 휠체어를 밀고 아이 집에 당도하면 아이엄마가 당시에는 귀하였던 라면을 끓여주어 그 맛에 겨워하곤 하였다. 보잘것없는 추억에도 값 주고 살 수 없는 행복이 서려있는데 하물며…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 3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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