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이사야 18:4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10
오늘 이사야서는 구스에 대한 구원의 약속의 장이다. 저들은 앗수르로부터 유다를 도왔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신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잠 21:2).” 어떤 행위로도 감출 수 없는 마음의 일에 대하여 나는 항상 부끄럽다. 저가 나로 하여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을 더위에 운무’ 같으시다. 열매를 익히는 이슬이시다. 나의 방패.
다 끝내고 집에 들어오는데 갑자기 숨이 막혔다. 심리적인 요인인지 신체적인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이대로 숨이 멎는 게 아닌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서둘러 씻고 선풍기 앞에 누웠다. 안정제를 한 알 삼켰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처럼 마음이 의연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무서웠다. 구조대를 불러야 하나? 하는 망설임은 절망처럼 더욱 두렵게 다가왔다. 땀을 너무 흘려서 그런가? 뭘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엉뚱한 추론을 하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잠을 청했다.
아이가 후원헌금을 들고 왔다. 무거운 애호박 세 덩이도 같이 들려 있었다. 아이엄마는 이달 말에 셋째를 낳는다. 수업을 마치고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아이들이 적은 기도 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기도에 빚진 마음은 종종 면구스럽게 한다. 목사님이 기도해주신다고 하니 힘이 나네요. 하는 말에 왜 부끄러움이 먼저 드는 것일까? ‘감사편지공모전’에 보낼 원고를 쓰기도 할 겸 부모에게 편지를 쓰게 하였더니 아이들은 힘들어했다. 비가 오니까 컵라면을 하나씩 끓여주었다.
주께서 나를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사 18:4).” 어떤 말, 무슨 생각은 민망하여 송구하기만 한데, 하나님이시어서 다 괜찮은 마음도 생활도 있다. 늘 마음이 정직했으면 좋겠는데 어림도 없다. 행동이야 내 마음과 달리 인위적이고 위선적일 때가 있지만 정작 늘 나를 괴롭히는 건 마음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하는 말씀 앞에서는 두렵기만 하다.
아무리 해도 정직해질 수가 없다. 호흡이 어려울 때 순간 이러다 죽는가, 싶을 때 나는 무서워서 그 무서움이 더욱 나를 두렵게 하였다. 아프다가 아파서 주를 외면하는 자리에 처하지는 않을까. 지금은 의연한듯하나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엉뚱한 걸 붙들고 애원하지는 않을까. 나는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더 높아서 그래서 더욱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아니 내가 아무리 그래도 주가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실 것을 구한다. 하루하루가 또는 매순간이 때론 힘에 겨워서. 사우나에서 한 노인이 어제는 왜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우리가 서로 그걸 물어볼 사이는 아닌데 하고 있을 때, 이 나이쯤 되니까 돌아서면 안녕이라. 저의 말이 슬펐다.
교회와 같은 층을 쓰는 무슨 여성 전용 체험장에는 나이든 어머니들이 바글바글하다. 몸이 곤하여 뒤뚱거리고 엉거주춤하면서도 열심히들 들락거린다. 안에서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하는 게 꼭 어디 부흥회하는 기도원 같다. 그런데 다들 너무 열심이라.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뛰기 시작하던 한 무리의 모친들이 실은 서로 좋은 자리를 두고 그런다는 데 놀랐다. 어제는 아침에 일찍 글방으로 갔는데 아직 여덟 시 반도 안 된 시각에 복도에 줄지어 앉아 웅성거리며 순서를 기다리는 데 놀랐다. 살면서 사느라 기를 쓰고 산 인생들일 텐데, 노년의 암투가 콧등을 시큰하게 하였다.
오후께 고린도후서 6장 1-10절 말씀을 묵상하였다. 내가 이해하기 쉽게 행과 연을 나누어 줄글을 마디글로 읽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성경이 권하신다.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 은혜란 매순간의 것이지, 지난날의 것을 붙들고 살 수는 없다. 그랬었지, 하는 감격은 오늘의 은혜에 따른 뒷받침 내용일 뿐이다. 주는 내게 은혜를 베푸실 때 내게 들으신다. 아뢰지 않으면 도우실 수 없다. 아니 그 도움이 실제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려니 할 때 은혜도 싱겁게 된다. ‘듣고 구원의 날에’ 나를 도우신다. 기도할게요, 하는 말은 엄청난 채무다. 반드시 갚아야 할 일이다. 목사님이 기도해주신다니 힘이 나네요. 한 아이엄마의 말이 그 무게를 가중시켰다.
기도는 주께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마음을 기울여 주님도 들으신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그러니 은혜는 ‘지금’에 해당되는 것이지 지나날, 혹은 앞으로의 것이 아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곧 아룀과 동시에 구원은 이루어진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멀뚱히 나는 그런가? 싶은데 주님은 벌써 이루셨다. 나는 잊어버렸는데 주님은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았고, 그때 서원하기를 주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어린 게 뭘 알았다고, 같이 있던 또래 아이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회개했고 감격했고 서원했다. 한동안 나는 잊고 살았으며 외면하여 극히 다른 길로 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그때 죽어 마땅했는데,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더하셨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파렴치한 순간에도 주님은 나를 붙드셨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께는 언제나 지금뿐이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이는 내 안에 작동하는 주의 영이 하신다. 그렇듯 막 살던 시절에도 늘 뭔가 있었다. 이게 아닌데, 싶은. 어떤 부끄러움 같은. 내 자리가 아니라, 나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지금은 자천하여 주께 유용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다른 무엇보다 주를 먼저 바라고 구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신기하다. 내가 주를 바라는 일이 말이다.
그런 어려운 처지에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선다는 데 확신이 든다. 내 보기에는 물론 남들 보기에도 보잘것없이 비루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깨끗함을 바라고 바른 지식을 붙들며 오래 참음으로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붙듦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의의 무기로 주어지는 것을 안다. 분명히 느낀다. 이게 맞나? 싶어 하는 의구심에도 어떤 확신이 또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내 안에서 이중적인, 현실에서는 모순되게 영광과 욕됨이, 악함과 아름다움이 맞서 싸우는데도 어떤 당당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와 같은 갈등이 첨예하게 맞서지만 분명한 건 분명하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내 안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주는 사랑이심을 더욱 확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의연했으면 좋겠고 두려움과는 별개였으면 좋겠다. 말씀과 나의 생활이 일치였으면 좋겠고 일심으로 주를 바라는 데 있어 흔들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럴 수 없을까봐 무섭다. 나의 무서움이 주를 바라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한다. 하여 욥의 고백이 내 것이기를 기도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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