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이사야 20:6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시편 9:20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임의로 인도하신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지만 바람은 늘 정해진 길을 따라 흐른다. 예정과 섭리에 대하여 그 계획하심을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래서 내게 성경을 두셨구나. 미뤄 짐작해서 알라는 게 아니라 그 확실함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말이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아침 일찍 아이가 카톡을 했다. 가도 되냐는 말에 마음부터 분주해졌다. 다녀봤던, 그러나 지금은 다니지 않는 경우였다. 한 아이는 엄마랑 같이 다녔었는데 지금은 안 다닌다고 하였다. 그랬구나, 싶은 건 또 있었다. 늘 새침데기에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잘도 서러워하는 아이가 열심이었다. 누구도 데려가도 돼요? 누군 글방에 안 다니는데 괜찮아요? 아이의 그런 변화가 어리둥절했다. 이게 어찌 사람이 하는 일이겠나.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설교는 설교자가 대중을 향한 선포이겠으나 앞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내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아서 하겠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아 알았다. 나의 마음은 보에 가두어둔 물과 같아서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어디로 흘려보내실지, 물꼬를 어디에 어떻게 트실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논에 물이 넘나들도록 만드시는 데 있어 때론 그게 어린아이에게 또는 완고한 아이엄마나 또 전혀 상관도 없는 제3 자의 경우일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논의 물꼬를 따라 물이 드는 일처럼, 그러기 위해 보에 물이 차야하고 그 물을 채우는 일에 나를 소용되게 하시는 거였다. 그렇구나. 구별됨이란 단지 종교적인 감상이 아니었다. 결코 의미 없음은 없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주께만 집중하게 하시려고 가난도 질병도 심약함도 때론 안달복달하는 애끓음도 허용하시었다. 기어이 나는 성령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보에는 물이 채워져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주 오랜만에 주일학교 아이들 앞에서 설교를 한 셈이다. 말투는 물론이고 예를 드는 상황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것이다. 낯설어서 쩔쩔매다, 늘 내 마음 같지 않은 일들에 대하여 그 주인 되시는 이가 하나님이실 때와 내가 주인이려 할 때의 차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횡설수설한 것 같은데 모르겠다. 이제는 일단 하고 나면 나도 모른다. 오게 하신 이가 듣게 하시고 듣게 하신 이가 그 안에 싹을 틔우실 거였다. 내 일은 보에 물이 마르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말씀을 채우고, 말씀대로 살아간 이들의 삶을 채우고, 내게 두시는 모든 상황들과 형편을 늘 주 앞에서 바르게 점검하는 일이겠다.
이때 또 말씀이 지침이고 기준이며 안내서고 거울이다. 그리하여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6:13).” 말씀이 보에 가득 채워져 있으면 주께서 물꼬를 어디로 트시든 그 고랑을 따라 흘러가기만 하면 된다. 굳게 설 수 있는 힘이 든든히 채워져 있는 성령의 분량이겠다. 그럴 때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보는 다만 담아두는 것뿐이지 실은 그 물이 내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집중이란 주님과의 관계 외에 다른 데 신경 쓰지 않는 일이다. 이것도 일이어서 수고하고 애쓰지 않으면 금세 또 다른 데 기울기 십상이다. 보가 터져 물이 샌다면 그 역할은 제한되거나 쓸모없어진다. 내가 의지하던 것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그 허망함을 일깨우신다.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사 20:6).”
쓰레기를 피하려고 똥밭을 뒹군 꼴이다.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어떠했던가. 선생이 또 친구가, 사랑이 또한 우정이 하나님을 더욱 멀리하게 하여 그릇 행하게 하였다. 모든 문화가 또 예술이 하나님을 멀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주님과만 바른 관계를 바라면서 보니 그 숱한 도움이 실은 주님과의 관계를 훼방하는 것들이었다. 흥얼거리던 노래가, 떠올려 위로를 삼으려는 문장이, 언제든 전화해서 시시콜콜 마음을 나눌 수 있다고 여겼던 친구가… “그들이(내가)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내가)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5).”
그랬다. 저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였다. 그런 노래였고 그런 생각이었으며 그런 표현이었고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바라던 ‘구스’를 나는 롤모델로 혹은 멘토로 여겼었다. 그가 추구하는 ‘애굽’을 이상적이라 생각하고 나도 그 안에 편승하기를 바랐었다. 왜 자꾸 하나님은 나를 밀어내셨는지, 기껏 다 됐다 싶으면 왜 꼭 나만 떨어져 나오게 하셨는지 이제는 알겠다. 저는 다원주의자였고, 그 일은 사이비종교보다 이단적이었고, 저들이 추구하던 삶은 하나님을 별개로 하는 세상이었다.
그렇듯 나를 징계하심은 저들과 같이 멸망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그래서 때론 병들게 하시고, 실패하게 하시고, 좌절과 절망 가운데 처하게 하시고 심지어는 일찍 죽여서라도 살리시려는 거였다. 내 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오욕을 씻어내신다. 돈에 끌려가고, 색을 밝히며, 식탐에 절고, 명예를 구하며, 게으름에 잠들었던 오욕의 늪에서 건지시려고….
그리하여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내 마음이 주의 보였다. 여호와께 봇물과 같아서 임의로 그 마음을 흘러가게 하시는 거였다. 까마득한 기억 저편에 잠깐 주일학교 앞에서 말씀을 전하던 때가 생각나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 쌍둥이 엄마, 약사애가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다는 아이와 뚱뚱해져서 살 빠지면 보러 오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아이와 저기 구리에 사는 아이가 다 그때 내가 맡았던 반 아이들이었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아이들에게 눈을 마주치고 다시 말씀을 전하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앞에 앉아 있는 아이도 중학교 1학년 때에 만났으니까, 물꼬를 타고 흐르는 성령의 물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무엇에 당도하기까지 흐르고 또 흐르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음 주일은 여자 친구랑 부산에 놀라갈 거 같다는 큰애에게 그래서 주일에 못 올 것 같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가며 내가 애를 태우는 일도, 실은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말 일인데 나도 모르게 주의 이름을 부르며 도와주세요, 하는 이 마음의 길을.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시 9:20).” 어느 훗날 우리 저 아이도 주 앞에서 오늘을 돌아볼 것이다. 어느 아찔하였던 마음을 쓸어내리며 주의 도우심과 은총에 저절로 감사가 흘러나올 것이다. 결국은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잠 9:12).” 하는 이 단순한 명제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안에 고이는 주의 성령을 채우고 또 채워서 어느 날 문득 물꼬를 트실 때,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그게 내 일이었다. 맡기신 사명이었다. 이걸 뭐하나, 어디에 쓰나,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따위의 갈등은 내 몫이 아닌 걸 가지고 씨름하는 꼴이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14).” 오직 주만 바라볼 따름이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5-17).” 이렇듯 말씀 앞에 앉아 말씀이 나를 주관하시기를. 보기엔 형편없고 별 볼 일이 없으나 그건 주가 하신다. 나의 마음을 봇물 같이 임의로 사용하실 것이다. 이렇듯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생각하고 느꼈다가 나는 도로 다 잊어버린 것처럼 살아가겠으나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주가 사용하실 때가 이르리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나도 나를 감당하지 못하도록 하시려고, 그래서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셨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면 일을 망친다. 깨지기 십상이다. 내 마음을 내가 가장 못 믿는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팔랑거리고 뒤집기가 어찌나 가벼운지 모른다.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내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시 9: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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