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이사야 23:18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시편 12:5
주시는 것은 그 쓰임에 따른 용도가 다 있다.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 옳다. 저축이 사람을 누수하게 할 수 있다. 모으는 데 기를 쓰는 것은 죄의 한 형태다. 간혹 연예인들 사이에 신발을 모으고 가방을 모으고 모자가 수 백 개가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여러 대 모으는 것을 보는데, 그러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볼썽사납다. 주를 모르는 사람이면이야 그 속이 헛헛함으로 그럴 수 있겠다. 채워도 모아도 끝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잘 갖고 잘 쓰는 원리가 성경에 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그 표준을 삼게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시 12:5).” 그곳에 쓰임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신 24:20).” 이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곧 “데마 땅의 주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사 21:14).”
물질에서 뿐 아니라 감정도, 생각도, 시간도, 마음 씀에서도 그리로 흐르게 하여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하나님이 어린 아이로 이 땅에 오셨다. 곧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능력은 낮아질 수 있는 것이다. 내려올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신다. 물론 우린 산 위에 머물며 특이한 체험과 환상 가운데서 변화된 주님의 모습에 심취해서 살고 싶어 한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막 9:5).”
나만 독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흐르지 않는 은혜는 고이면 썩는다. 산 정상에만 머물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은혜 받은 자의 특징이기도 하겠으나,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8).” 실전의 삶으로 다시 이끄시는 것이다. 후에 베드로의 고백은 달라졌다.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8-19).”
주의해야 한다.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은 주가 주셔야 한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러한 생각을 자주하게 되었다. 하다못해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는 일에서부터 글을 써서 복사해서 올리는 일까지, 일일이 손이 가야 하는 일이었다. 짜증을 부리는 아이에게 기분을 맞춰주고 생일 당했다는 친구에게 뭐라 축하의 말을 건네는 일에서도,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하는 일이란 몸소 사는 것이다.
설교란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기는 쉬운 것이어도 내가 그처럼 사는 것은 어렵다. 어려워서 사투를 벌이는 게 나의 하루였다. 누가 아는 사람도 없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지만 내 안의 선한 양심은 아는 일이다. 그래서 늘 이런 내가 무슨 낯짝으로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송구하고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참 신기한 건 은혜가 충만하다 싶을 때 ‘귀신들린 소년을 만난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막 9:17).”
이제 막 변화산에서 은혜 충만하여 산을 내려오던 길 아니었나?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며 아, 좋다! 하고 관련된 말씀을 찾아 메모해두다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왔을 때 별 일도 아닌 것으로 혈기가 또 화가 나를 부여잡고 흔든 것이다. 짜증과 어떤 역정이 나를 휘어잡을 때는 정신을 못 차리겠다. 먼저 툭 튀어나오는 삐딱한 말과 상스러운 생각이 주도하고 그럼 또 화는 더, 더 화를 부르면서 좀체 사그러들려하지 않는 것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8).”
아놔.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이제 좀 달라지려나 싶으면 금세 또 다를 바 없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19).” 나의 믿음이 믿음이 없는 세대와 다를 바 없다. 나는 믿는다고 믿는데 그 믿음이 실은 나의 신념에서 나오는 거였다. 말 그대로 믿는다고 믿는 믿음 말이다. 이때의 방법은 예수께로 가져가는 수밖에.
데려오라. 공연히 아내에게 불쑥 화를 내는 일, 무엇에 짜증이 먼저 이는 과정, 누구에 대해 괜한 서운함만 쌓이는 일, 어떤 오해, 염려, 끊이지 않는 근심들.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다. 예수께로 데려가는 수밖에는 말이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20).” 더 나빠지고 공연히 망친 것만 같다. 한다고 했는데 아이는 더 삐딱하고 오히려 이제 나를 친하게 여겨서 그런가 무시하듯 헤헤거린다. 교회는 가소로운 게 되었고 예배는 와주는 게 되었다. 차라리 그냥 고상하게 글방 선생으로 있을 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들 정도이다.
그럴 때 나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한다. 이런 상황에 무엇을 하실 수 있겠나만, 뭐라도 하실 수 있거든 말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22).” 어쩌면 산 아래에 내려와서 사는 삶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고작 굳건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여전히 의심어린 마음으로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하는 단서를 달며 막연하여하는 건 아닐까?
능히 하실 수 있다는 데까지 이르기란, 성령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23).” 불쑥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고, 오후께 수업을 하다 아이들에게 진을 다 빼고, 나는 시무룩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주세요.’ 하였다. 아,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언제쯤 나도 의연하고 초연하게 주만 바라며 인자하게 또 온유하게 살 수 있을까. 의심의 기도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기도였다.
조금은 우울하였고 또 불안하였다. 딸애가 퇴근하며 삼계탕을 먹자고 해서 저녁을 같이 했다. 기도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9).” 나의 기도는 언제나 기도를 위한 기도이기보다 무언가 나의 소원을 요구를 간구를 어떤 곤란한 일을 들고 나갔다. 온갖 단서가 달린 기도는 요구에 집중하느라 정작 내가 기도하는 이를, 주님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가만히 주님만으로 주님 앞에 앉는 게 아니라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찬 요구조건을 풀어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놓고는 체크를 하는 것이다. 뭐가 결제가 됐는지. 뭐는 아직 미결인지. 왜 아직도 미루시는지.
주무시나요?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시 44:23).” 아, 나의 이 한심한 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의 기도 말고는 오늘 이 땅에 사는 동안 진정한 기도는 할 수 없는 것일까?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나라와 영광이 임하시기를. 무엇보다 그것을 앞서 구할 수 있는 기도는 묘연한 것일까?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나를 일부러 외로운 데 두시기도 한다.
무역으로 부를 자랑하던 두로에 대한 경고를 읽는다. 뭐든 다 잘 될 줄 알았던 부와 명예는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였다. 결국 저들의 수고는 하나님 앞에 사는 자의 것이 된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사 23:18).” 이것으로 우리는 주의 뜻을 살펴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시 12:5).”
하나님만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사는 일이 복되다. 보다 바르게 또 온전할 수 있다면 나는 괜한 참견쟁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뭐라 나무라고 꾸짖고 야단치는 게 설교가 아니고 그러는 게 목사가 아니다. 살아서 삶으로 두신 이에게 향기를 발하는 것.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아, 그렇구나. 나를 짜증나게 했던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질문과 장난과 치대는 말들이 주께 드려지는 나의 일상이었겠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서,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러하게 하시려는 거였다. 사소하나 귀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대체 이 아이들과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을 때. 또 화를 짜증을 부린 아내에게 면목이 없을 때도,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7-8).” 그리하여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6).”
주가 내려오신 그 능력으로 나에게도 내려놓음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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