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17. 7. 15. 07:32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이사야 25:1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이 문장을 여러 번 되뇌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머리로는 백 번 천 번 이해하고 알 것 같은 것이 실제로 다가올 때는 여지없이 물방울 터지듯 흩어진다. 말씀을 묵상하고 누구에게 권면할 때는 마치 아무래도 다 좋을 것처럼,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로다. 하는 심정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러다 호흡이 가빠지고 왜 이러지?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는 머리가 다 하얘진다. 내가 과연 믿음이 있기는 한 것인가? 하고 말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이와 같은 고백이 얼마나 값진가.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두렵다. 혹시 내가 주를 모른다 하고 외면하는 자리에 들지 않을까, 하여 말이다. 좀 유치한 얘기지만 아주 어릴 때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을까? 이런 비슷한 생각으로 혼자 무서워했던 기억이 있다. 평소엔 잘 믿는다고 믿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주를 배신하면 어쩌지? 믿어진다고 하지만 정말 믿고 있는 게 맞을까? 그저 감정적으로, 그럴 거야! 싶은 게 믿음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나는 믿음이 무서웠었다. 믿음을 믿지 못할 거 같아서 말이다.

 

이번 주간은 유독 믿음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고 언급하였던 것 같다. 믿는다는 건 곧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믿습니다. 하고 말하지만 실은 주셔야 하는 것이지 나의 결기어린 마음으로는 아니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나는 나를 믿지 못했던 것 같다. 믿습니다. 하고 말하는 나의 믿음을 말이다. 어떻게 믿을 수 있냐 말이지.

 

조금 더 자라면서는 그게 다 세뇌당한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부모 형제가 또 주변 사람들이 다들 믿는다 믿는다 하니까 덩달아 나도 믿는다 그러는 것이지 실은 정말 믿음이 있어서 믿는다고 한 게 맞나? 싶은 것이다. 그런 거 보면 믿는다는 건 감정의 개념의 아니라 실체의 개념이다. 죽을 것처럼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숨이 가빠지고 호흡이 어려울 때, 과연 나는 끝까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엉뚱하게도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느라 드는 비용은 평소에 지불된다.

 

매사에 또 순간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 익숙해져 있는가. 사소한 칭얼거림에서부터 어떤 어렵고 고단한 현실을 앞에 두고서도, 주님! 하고 이런저런 말을 되뇌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오늘 이사야는 약속의 메시지를 붙들고 주를 찬양한다.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심정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는, 연습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이와 같은 고백이 날마다 내 것이어야 한다. 그러할 때 자유는 참 자유가 된다. 막연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자유가 아니라,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지킬 수 있는 자유다. 그게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 알겠는데,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내 삶에 가져다 지키고 싶지는 않은, 아니 그럴 수 없는 세상에서 온전히 말씀만 의지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전에는 돈 때문에, 외로워서, 누가 좋아서, 무얼 하느라, 건강 때문에, 인연을 위해 미루고 마다하고 부담스러워하던 말씀이 말씀만으로 충분한 자유.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한 아이가 장염에 걸려 두 아이만 왔다. 아직 초딩 4학년이라 자판을 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아무리 두 손으로 치라고 해도 자꾸 한 손으로 쳤다. 부모에게 쓴 편지글을 정서하여 이달 말에 공모전에 보낼 거였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 자판을 쳐보였다. 나야말로 한 손으로 치는 걸 아이들은 놀라워했다. 한 쪽 팔은 힘이 없어서 그래. 나의 말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양 손으로 반듯하니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니! 나에게 두신 두 번째 자유는 낮아질 수 있다는 거였다.

 

누가 알까봐 혹시나 해서 부끄러워하던 걸 이제는 (여전히 쭈뼛거리지만) 숨기지 않는다. 그게 혹시 교훈이 될 수 있다면 밝혀 말해주려고 한다. 낮아진다는 말, 괜히 멋지고 겸양을 떠는 것처럼 근사해보이지만 실은 이게 고약하다. 누가 날 얕잡아 볼까, 업신여길까, 무시할까 하여 날카롭게 굴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의 약함을 괜히 숨기려는 마음도 그래서였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좀 나아보이는 척, 나의 온갖 척에 대하여는 신물이 난다. 지겹도록 지겹다. 한데도 이를 쉬 내려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내게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는 자유함을 주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자존심보다 직접적인 죄의 흔적이 또 있을까? 무시당하는 꼴을 못 본다. 그러느니 죽겠다면서 실제 목숨을 끊는 이도 허다하다. 싸움의 열에 아홉은 감정이 상한 것이다.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래서 시비가 붙는다. 이를 지키기 위해 어떤 조치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나를 내려놓을 때 얻는 자유함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비워 낮아지신 것에 비할 수 있나? 사람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세 번째는 그런 주님을 따르고 싶어 하는 자유를 주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그게 안 돼서 고통스러워할 줄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어서 애가 탄다. 좀 더 너그러웠으면, 이럴 땐 온화하게 겸손하게 긍휼한 마음이었으면, 의연하여서 초연하게 굴었으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었으면, 하고 말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나는 어림없다. 아, 네 괜찮습니다. 하면서도 속으론 원망하고 저주하고 있다. 인자한 표정을 짓지만 실은 짜증이 또 미움이 내 안에 가득하다. 그래서 그럼에도 염치없게 주의 마음을 사모한다면 이 또한 자유하다.

 

그러기 싫어했던 날을 기억한다. 그럴까봐 주저했던 날들도 있다. 좋고 좋기만 한 세상을 포기하기 싫어서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하지 못했다. 사람의 말에, 누구와 친해지려고, 어디서 떨어져 나올까봐, 이 좋은 걸 마다할 수 없어서, 그러느니 예수의 마음을 포기하는 쪽이 더 쉬워보였다. 괜히 신경 쓰고 공연한 마음에 부담만 가중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 네 번째로는 깨끗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이지만, 유혹은 말 그대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새처럼 수시로 지저귀지만 더는 그것이 내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순결을 사모고 순종을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럴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주어진 것이다.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였으면 좋겠다. 이처럼 깨끗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로 살게 하심을 감사한다. 물론 백 번 천 번 양보해도 나는 어림없다. 수시로 드나드는 음란한 생각과 불평스러운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꼭 보면 또 그러고 있다. 이런 내가 과연 주를 믿는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 없다. 이로써 성령이 나와 늘 함께 계셔야 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나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이 하신다.

 

감사한 것은 몸이 어디가 안 좋을 때 더욱 경건함을 사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엄습할 때 나는 이제 주의 이름 말고는 부르고 의지할 게 없어서 다행이다. 내게 두신 나의 몸을 솔직히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때론 고달프고 때론 너무 힘들다. 한데 분명한 건, 이제는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그래서 더욱 주를 의지한다. 나는 두 형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씨에 대해 말해주었다. 감사란 넉넉하고 풍족할 때 드려지는 게 아니란다.

 

자유란 방종이 아니다. 널널하고 맘대로 굴 수 있는 게 자유가 아니다. 전에는 안 되던 게 이제는 되는 것이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걸 이제는 소망하는 것이다. 사모함으로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게 자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게 자유다. 예전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게 자유다.

 

곧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자유. 그리하여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하며 주를 바랄 수 있는 자유. 아울러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주가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고백할 수 있는 자유. 약을 먹고 호흡을 고르며 같이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릴 때,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주의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에 대하여 감사해 할 수 있는 자유.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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