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22:25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편 11:3
아이가 달려와 아는 체를 했다. 바나나 줄까? 하고 묻자 아이가 얼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또래 친구 둘도 덩달아 손을 내밀었다. 하나씩 줄까, 나눠줄까. 혼자 생각하다 풉, 웃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나씩 나눠주고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민망하게 여겼다. 하나는 ‘이슬 같아야 한다’는 것.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 14:5).”
또 하나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어린 아이’를 돌보는 일에 대하여,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기껏 생각하고 묵상한 뒤였는데도 말이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밉고 싫은 아이가 이상하게 더 붙는다. 경우가 없고 되바라져 은근히 얄미운 아이인데 유난히 그렇게 크게 아는 체를 하고 달려와 인사를 한다. 그러니 내 안에 드는 마음이 문제이지 아이가 무슨 문제이겠나.
특별하다는 건 실제 거반 평범함 가운데서 예를 드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돋보이지만 다수의 많은 이름 없는 제자들도 있었다. 누구나 바울처럼 특별할 수는 없다. 그런 경험과 그런 탁월함은 말 그대로 특별한 것이다. 이를 추구하느라 자신의 평범함을 가벼이 여기는 건 어리석다. 오히려 특별하지 않은 평범함이 어디 있겠나. 실은 이 모든 게 하나님 앞에서 그다지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저들도 예수님처럼 살았고 나도 예수님처럼 살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열광 받는 경우라면 오히려 두려운 일이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은, 예수님보다 평범했던 인생이 또 어디 있나.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이에 비춰볼 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목회가 더 위험한 것이겠다. 열에 하나 그 마음에 우쭐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을 테니까.
오늘 이사야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22:25).” 환호와 환대가 아무리 단단한 것 같아도 다 삭아지고 부서질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란 그런 거였다. 죽고 못 살 것처럼 입에 혀처럼 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때 가장 든든했던 사람이 가장 세게 치는 법이다. 주를 바란다는 게 어찌 사람을 외면하고 나 몰라라 하면서 갈 수 있는 길이겠나만, 의지하지는 말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의 문제겠다. 찬양도 좋고 친교도 좋고 함께 어울려 기도도 좋고 위로도 좋은 것이겠으나, 사람은 사람이다. 내가 얼마든지 그런 사람이었듯이 누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되 의지하지는 말자. 주의 마음으로 대하되 저를 신뢰하지는 말자. 오직 주만을 바라게 하시려고, 성경은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로 두신다.
영적으로 거지같아서 주께 손 내밀지 않으면 단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걸, 이를 마치 구차하다는 듯 여기는 이는 참으로 위선적이다. 이미 충분히 세상을 그리 살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 앞에서만 유독 센 척 하는 것일까? 직장에서 잘릴까봐 거지처럼 굴고, 손님이 떨어질까 봐 아니꼽고 더러워도 거지처럼 굴면서 왜 성경의 말씀 앞에서는 유세를 떨며 하나님과 맞서려하는 것인지. 아, 그 마음이 죄로구나.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난 척 센 척 괜히 하나님만 우습게 여기려는 마음이 말이다.
몹시 덥고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오전에 일찍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다. 딱히 이상이 없다는 말에 안도하였다. 수면내시경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느 훗날 하나님 나라에서 그렇게 깨어나지 않을까? 뭔가 새로운,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낯설지 않은 그러나 어리둥절한, 같은 세상인데 전혀 다른 느낌의 한 세상. 죽을 때도 그렇듯 고요히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 주의 나라에서 깨어날 때의 느낌을 상상하였다. 오후에 중2 아이들에게 <파리대왕>에 대한 감상문을 쓰게 하였다.
악의 원천이라는 의미의 ‘파리’가 실은 우리 안에 있었다는 사실. 한 무리의 어린 사관생도들이 비행기에서 추락하여 무인도에 갇히게 되면서 벌어지는 무질서의 세계를 그린 영화다.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줄거리 요약도 감상도 아닌 자기 안에 그와 같은 악의 근원을 마주했으면 하였다. 그 뿌리는 유구하여서 아담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바 된 사실에 대하여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끓어 안고 살아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쓸 게 없어요. 하는 아이 말에 너의 이야기를 해. 하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들여다보기 싫은 것이다. 한사코 외면하면서 난 아니야,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피해 나무 그늘로 숨어버린 처음 사람처럼 말이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약 4:1-3).” 자기 자신과도 말이다.
내가 뭔가 특별하기를 바라지 말고 주가 두시는 평범함 속에서 성실해야지. 이슬이란 그런 것이어서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존재가 아닌가. 뭘 굳이 인정받아야 할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보고 수고해야 할 것도 아니다.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나의 일상에 저를 두셨기 때문이지 뭘 바라고 의도해서가 아닌 것이다. 저 애가 얄미운 건 나의 얄팍한 인성의 문제지 저 아이 탓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고 아이고 아직 어린 것을. 그러므로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유 1:2).”
이슬은 장소를 개의치 않는다. 적시고 스며들어 생기를 더한다. 햇살을 받음으로 더욱 활개치게 돕는다. 사그라져 없어지지만 그 안에 서린다. 안개와는 다르다. 어디에 붙지 못한 마음 같다. 휘휘 불려 다닌다. 여긴 것 같다가 저긴 것 같아서 아무 데도 어울리지 못하다 만다. 이슬은 무겁다. 밤낚시를 할 때 이슬이 천근이란 말을 종종 한다. 몸을 누르는 힘이 가히 대단하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 14:5).”
주가 나를 백합화로 피우시는 데 있어 이슬이 되신다. 주가 내게 바라시는 것이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아 2:2).” 그 향기가 진동을 하여 거리로까지 넘쳐나는 것은 가시나무에 찔린 까닭으로 향기가 더 짙겠다. 내가 누구에게 이슬이 되어주는 일과 백합화의 향기가 되어주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평범하다는 게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일인지를 말이다. 뭘 대단히 꾸며 추구해야 의가 아니다.
그리하여 눈에 띄지 않는 어린 아이를 대하고 주의 마음을 건사하는 일. 새삼 내게 과중한 일을 두셨구나, 생각하였다. 어른 성도가 좀 와야지요! 나름 교회를 걱정한다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비슷했다. 뭘 염려하는지도 알겠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나를 빙충이처럼 두시는가, 알겠다. 어른 성도(?)들의 눈에 별 거 아닌 것 같은 사람이어도, 교회여도, 주께서 우리에게 아이들을 맡기시는구나. 얘들을 거두고 먹이고 쓰는 비용이 만만찮은데 그 어려움은 주의 몫이었다. 우린 그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벅차다.
고작 바나나 하나씩 나눠주는 일에서도 옹졸하게 아까워하는 위인인 걸 아신다. 하여 나의 기도는,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7-8).” 왜냐하면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9).”
이럴 때 읊조리는 말씀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곧 믿는다는 일, 이보다 더 위대한 가치를 나는 모른다. 마음은 저 혼자 쩔쩔매기 일쑤고 수시로 드나드는 염려와 근심은 나를 조롱하듯 시비를 걸기 일쑤지만,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시 35: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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