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17. 7. 14. 07:41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사야 24:19-20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

잠언 13:6

 

 

그 날에 누군 슬피 울며 이를 갈고 누군 주를 찬송하며 경배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24:21-22).” 그저 막연하게 들을 때는 환상적으로 들리거나 끔찍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가슴을 쥐어짜며 슬피 우는 이에게는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고, 무소불위처럼 굴던 이에게는 그 권력이 부와 명예가 박살나는 때이다.

 

이때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19-20).” 한데 여호와의 날에 주의 백성들은 찬송한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계18:20).”

 

그리하여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곧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잠 13:6).” 이와 같이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심이 말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나의 수고와 공로로 인한 게 아니어서 더더욱 감사하다. 그러므로 묵묵히 주를 바라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겠구나.

 

늙은 노모는 아침마다 땀에 곤죽이 될 정도로 복도 청소를 하였다. 보다 못해 찬 보리차를 한 병 가져다주었다. 같이 쓰는 다용도실에 하루살이가 꼬이고 바퀴벌레가 돌아다녔다. 그래서 몰래 약을 사다가 뿌리고 락스질을 하였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하고 투덜거리다 내가 지친 것이다. 그러기까지 남을 비판하고 욕하고 비난하였다. 그러다 그게 나를 향한 소리가 되었다. 처음부터 순수하면 좋겠는데, 늘 앞서 나는 삐딱하다. 같이 쓰는 바닥의 얼룩이 나에게만 보이는가, 내가 못 견디겠어서 말이다.

 

주님만 보고 산다는 게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가 아닐까? 모든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쓰러진 누구네 입간판을 바로 세워주는 일, 아무렇게나 세워진 누구네 자전거를 바로 세워놓는 일,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데서 주님만 생각하고 하는 일이 주께 영광이 되지 않을까? 티내고 부추겨 원래 그런 사람입네 내세우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생의 목적이지는 않지만 예수를 생각하며 산다는 일은 그리 되게 되겠다. 자꾸 그런 게 보이니까 말이다. 사물이 말을 걸고 상황이 말을 하고 어떤 이가 호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똑바로 뜨는 것.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일이었다. 전에는 남의 말을 별식과 같이 즐기던 배가 아닌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던 뱃속이다.

 

원래 돌아앉아 남의 말 하는 것만큼 재미난 일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왜 뉴스가 재밌어지는지 알겠다. 온통 남의 말이다. 손가락질하며 어떤 사건의 무슨 일을 두고 누굴 욕한다. 어떻대, 하는 소리에 덩달아서 씨부렁거린다. 설교도 이와 같아서 누굴 훈계하고 어떤 일을 지시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면 결코 다를 바 없겠다. 말씀을 읽다, 이 말씀은 누가 들어야 하는데, 하는 식의 적용도 이와 같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26:22).” 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랬던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니! 과연 그런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큰 바위 얼굴>의 어니스트처럼 그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께 구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왜냐하면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 13:3-4).” 안 그래야지, 하지만 영락없이 그럴 것임을 나는 잘 안다.

 

그냥 묵묵히 하면 좋은데 나도 모르게 배알이 꼬인 사람처럼 누굴 비난하고 어떤 일에 불쾌감이 먼저 드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가 나를 살피지 않으시면, 나는 수시로 드나드는 온갖 더러움에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절로 내 기도다. 은연중에 굴림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선악과를 먹은 까닭은 아닐까? 태곳적 처음 사람의 선택이 내 안에는 여전하여서 ‘묵묵히’와 ‘무던함’을 훼방하는 것이다.

 

주를 따른다는 건 나의 주장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겠다. 따른다는 것은 복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찌 누구를 따를 수 있을까? 내 안이 다툼이 날마다 거기서 오는 거였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아이들이 너무 더워서 그런가, 짜증이 목구멍을 건드렸다. 별 얘기도 안 했는데 입을 삐쭉거리며 뚱하게 굴었다. 기독교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이웃, 배려>라는 주제의 글쓰기를 시켰다. 각자 컴퓨터 앞에 앉히고 각 단락의 소재를 정해주었다. 물론 그 소재는 무시해도 된다. 그런 식으로 쓰면 어떨까, 하는 것이지 꼭 그대로 써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한데 한 녀석은 글자 수까지 정확하게 시키는 것만 하려 한다. 지독히 수동적이다. 나는 바보처럼, 내가 싫으니? 하고 물었다. 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주님이 내게 물으실 때가 있다. 내가 싫으니? 하면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난처해한다.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인데, 그래서 착하게 살고 의를 행하고 선을 베풀려고 하는데. 투덜거리며 나를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하기까지 하다. 내가 아이에게 물었던 말은, 뭘 꼭 잘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성심껏 그 의도를 파악해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 땅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게 아니다. 선을 베풀고 의를 구하다 가신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 순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말이다.

 

아이에게 뭐라 하다 그 안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다. 내가 싫으니? 왜 시키는 것만 딱, 하려고 하니? 그럴 때 아이는 억울하기까지 하다. 각 단락의 문장 수를 맞추고 모두 합쳐 오십 줄로 글을 채우라고 해서 채웠는데 이제와 그게 무슨 소린가 싶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뚱딴지 같이, 내가 싫으니? 하고 물었으니.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은 내가 뭘 잘하기를 바라시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건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다. 그 이상을 바라시는 것이다.

 

그 이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 나는 동기 전도사에게 목사고시 공지 문자를 그대로 옮겨 발송해주었다. 주저하고 뭉그적거리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막 삐약거리는 아이가 둘이고, 돈도 좀 있어야 하겠고, 수고하는 아내 볼 낯도 없고. 그러니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는 거였다. 뭐라 길게 내 생각을 덧붙여 적으려다 그만두었다. 의도는 알겠으니, 주가 이루시길.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태도는 순응이다. 별 거 없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기껏 제일 먼저 글을 다 쓴 아이에게 내가 싫으니? 하고 묻고는 그 말에 내내 주께서 나에게 물으시는 말 같아서 어리둥절하였다. 한다고 하는데, 싶은 마음으로는 이 길을 못 간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8-19).” 거룩은 얻는 거지 이루는 게 아니었다. 곧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6).”

 

은덕을 베푸심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지 내가 무얼 잘해서가 아니었다. 주가 나에게 두시는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무엇을 위한 게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는 데 소용되기를. 곧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 하나님 앞에서 주저함이 없는 삶이었으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꺼리는 게 없어야 할 거였다. 나를 변명하지 않는,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느라 주저하지 않기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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