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더라
이사야 21:12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1, 18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잠언 10:9, 22
바벨론, 두마, 아라비아의 멸망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다가 행악을 일삼아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 경우다. 서로를 약탈하고 음해하고 악을 도모하는 일은 오늘에도 별반 다를 게 없다. 허구한 날 모함을 일삼으며 자기주장에 함몰된 국회나 있는 것들의 갑질과 없는 것들의 구구한 발악이 대립하여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와중에도 모처럼 장맛비답게 종일 비가 내렸다. “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더라(사 21:12).”
비로소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뜬금없는 소리지만 세상의 평화는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돌아오라 한들, 물으려거든 물어보라 한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결국은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 18).” 주가 하셔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주가 하실 수 있게 모든 걸 내어드리는 게 믿음일 테고, 그리 믿는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일이었구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우리가 어찌 우리 의지로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붙들 수 있을까? 그래서 또 믿음이란 선물이라고 하시었다. 하여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9, 22).”
근심을 겸하지 않으시는 복에 근심이 같이 든다면 이는 하나님 탓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모처럼 젊은 동기 내외가 두 딸과 함께 글방에 놀러왔다. 그냥 반가운 사람들은 우리가 주를 바라고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여서였다. 남들처럼 먹고 사는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것 같지만, 주께서 더하신 복이 우리를 부하게 하는데 몰래 숨어드는 근심으로 이게 무언가? 하고 주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다. 말을 안 해도, 굳이 설명을 길게 이어가지 않아도 한마음으로 주를 바란다는 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었다. 일심(一心)이란,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6).”
이런 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하는 바울의 증언이 아닐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그러니 저러니 해도 언제부터 곁에 아내가 또 남편이 두 아이가 오롯이 힘이 되어주며 함께 하지 아니하는가. 골골하며 당장 그만둘 사람처럼 겅중거리기 일쑤였는데, 어엿이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고,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그 고민의 근원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바르고 온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어서 말이다. 사나 죽으나.
그런 와중에서도 속은 울렁거리고 마음은 스산하여 별 수 없이 안정제를 몰래 삼켜야 하였지만, 산다는 일이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이겠구나 생각하였다. 예배는 그저 고상을 떨며 막연하여서 터무니없는 자기만족에 도취되는 게 아닐 것이다. 무슨 좋은 음악을 듣는 일처럼 또는 명작 앞에서 심취하여 감상을 음미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이처럼 치열하게 어쩌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나 연명하면서 헌데를 앓고 버려진 신분으로 근근이 살아가지만 그것까지도 충실하여서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나사로’로 살아가는 게 예배이지 않을까?
깨끗한 옷을 입고 정갈한 마음으로 잘 청소된 공간에 앉아 서비스를 받는 차원의 예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죽겠고 죽겠는 생활에서도 묵묵히 주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좋을 땐 그 좋음으로 주를 바라고 나쁠 땐 그 나쁨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는 것, 이것을 바울의 표현대로 옮기면 ‘사나 죽으나’로 진술되겠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는 것. 이 지경인데도 나는 주의 것이라는 것. 어떻게 이러실 수 있지? 하는 데서도 나는 주의 것이라는 것. 나는 주의 것이라는 걸 붙들 때 드는 마음이 예배일 거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 바로 그 기다림이지 않나. 기다림보다 믿음을 대신 표현할 말은 없겠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20).” 두 가지,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 하나. 둘, 성령으로 기도하는 일. 그저 막연하여서 멍 때리는 식의 기다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멍하니 자신을 놓아두는 일을 멈춰야 한다.
근신을 요구하신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자칫,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17-19).” 마치 평화를 구하는 자 같으나 시비를 걸고 자기를 부각시켜 남과 다른 삶을 지향하려 한다. 모순이다. 한데 우리는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육에 속하였고 분열을 일삼는 자로 성령이 없는 자들인 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근신을 지킨다는 말은 수고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되 멍 때리는 게 아니다. 온 힘을 다해 주를 생각하고, 온 마음을 다해 주께 기도하는 일. 그러기 위해서라도 다른 걸 포기하고 애써 추구하지 않으며 어울려 덩달아 설왕설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덕지덕지 파스를 붙이고 어디가 불편하고 아파서 끙끙거리면서도 주의 이름을 사모하는 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은데 어느새 우리는 그러고 있었다. 어느덧 맡기신 아이를 잘 건사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주를 바라며, 어떻게 하면 주의 뜻에 합한 길로 갈 수 있을까? 마음으로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든든한 후원자로 삼는 게 되었다. 동기 전도사 내외의 방문은 언제나 큰 위로가 된다. 좀 더 일찍 주를 바라며 그처럼 주 안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전해준다. 이는 단지 후회가 아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그런 이의 특징은 내가 하는 게 뭐 있다고요, 한다. 나의 연약함은 더욱 주를 바라는 데 소용되는 것이다. 아, 이런 사람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 비록 우리의 생활이 아웃사이더처럼 겉으로 밀려난 듯하나,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아니어서 그러므로 사느라 드는 비용을 주께 청구하는 일.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내 수고와 애씀의 결과를 바라는 게 아니라 주님만이 아십니다, 하는 감사로써 말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믿음이겠다.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걸 믿을 수는 없지만, 왜냐하면 나는 수시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게 있어 그것으로 근심이 드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데는 추호도 의심이 없는 믿음이 값지고 소중한 것이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곧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두 손을 드는 일.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일이며 애통하고 온유한 것이겠다. 다른 수가 없으니까. 나는 나를 신뢰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주의 사랑을 받아야 하겠으니까. 나는 나를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는 마음이 가난한 심령인 것이다. 애통이다. 온유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는 동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주가 이루신다는 것. 어느 훗날 우리는 주 앞에서 지금은 전혀 상상도 못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로서 주를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럴 수 있는 것이구나.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내가 어떻게? 내가 아니라 주가 하신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미 충분한 복에 복을 더하시었다. 주를 바람으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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