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심지가 견고한 자

전봉석 2017. 7. 16. 07:19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사야 26:3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편 14:6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언 14:10, 13

 

 

 

하루가 고요하였다. 아이 둘이 온다고 했다가 오지 못했다. 덕분에 아내가 일찍 교회로 나와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실내에서 신는 샌들을 사주었다. 아내는 들락거리며 혼자 분주하였다. 이상하지? 나는 교회에 있는 게 좋다. 이런 날은 일찍 집에 가도 될 텐데, 집에서는 자꾸 늘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선선한 바람이 들어차서 마냥 좋았다.

 

글방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도 좋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일도, 가만히 십자가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도. 아이 둘이 주일에 온다고 해서 김밥을 하기로 했다. 컵라면도 사두었다. 앉아서 책을 보다 오후께는 심심하여 <더 프로미스>영화를 보았다. 오스만제국 말기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인들 집단 학살을 그린,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였다. 사랑과 변심, 강포함과 온유, 인자와 잔인함이 뒤섞여 사람들을 지배하였다. 한 편의 영화를 잘 보면 한참동안 마음이 출렁거리는 것 같다.

 

어디서나 보면 심지가 굳은 사람이 뭐가 돼도 된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마음이 머문 셈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 하긴 부화뇌동하는 까닭은 심지가 굳지 못함이고 줏대가 없기 때문이다. 남의 의견을 그저 맹목적으로 좇아 어울린다. 줏대는 안목이다. 안목은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지혜자는 일러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 행동을 삼갈 수 있는 건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것이다. ‘심지가 견고한 자’, 주 앞에서 흔들림이 없을 때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신다.’ 온갖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듣는다. 나에겐 복음이 있다. 주가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시 14:6).”

 

가끔씩 숨이 가빠 안정제를 삼켰다. 불안해서 숨이 가쁜 것인지 가빠서 불안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행인 건 그래도 신경안정제를 먹으면 어느 정도 진정이 된다는 거였다. 딸애가 여섯 시가 조금 안 돼 일찍 글방으로 왔다. 같이 어디라도 갔으면 하는 눈치였는데, 돈도 없고 몸 상태도 그렇고, 내가 쭈뼛거리자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이라도 미주알고주알 내 속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나 때문에, 미안한 일이지만 것 또한 내 몫이 아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0, 13).” 아, 나는 괜히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든다. 서러움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이는 개별적이지만 계통적인 것이어서 누구나 다 그러하다. 그 속을 누가 알랴. 아이가 물었다. 이 글을 누가 읽어요? 아이에게 꾸준히 글을 쓸 것을 말해주다, 선생님은 그러고 있느냐는 질문에 엉뚱한 질문을 더한 것이다. 누가 읽어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하나님. 그리고 나. 아이는 싱겁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는 나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누가 안다고? 하나님이. 그래봐야 뭐해? 하나님으로. 나만 왜 이러고 있지? 하나님도. 해서 뭐해? 하나님께. 어쩌면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미심쩍어 자꾸 눈을 돌린다. 덧붙이고 덩달아서 기웃거린다. 이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아, 그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찾으시는구나. 그리하여 평강하다.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당장 몸은 찌글거리고 형편은 쪼들리며 외로움은 재채기처럼 나를 쥐어흔들고, 어떤 염려가 또 근심이 나를 사로잡기 일쑤지만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조약돌은 닳아갈수록 더 아름답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게 늙고 병들고 볼품없는 신세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겉으로는 별 볼 일 없다 해도 내 안에서 주를 바람은 조약돌처럼 단단하고 더욱 아름다워지는 거겠다. 그래서 내 겉사람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5).” 그렇지. 슬픔도 축복이라. 주를 바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대청마루 모퉁이가 맨들거리는 것은 숱한 사연을 어루만져왔기 때문이다. 성경이 너덜거리는 것은 묵상의 빈도이고, 노인의 짙은 주름은 오랜 세월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의 깊이다. 아기의 쪼글쪼글한 손금은 꼭 쥔 간절함의 증거이며, 바짝 마른 잎사귀는 사투를 다한 고결한 생명의 흔적이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하나 그것을 하나도 사사로이 지나치지 않으시는 분이 있다. 비록 우리는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그런 것이지만, 누가 알아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그래서 나는 모든 우연을 사랑한다. 사라질 수 없는 위로를 간직하였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영원을 바라는 데 있어 잠깐의 것이 늘 훼방한다.

 

그런 거 보면 건강한 영혼은 건강하지 못한 몸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다. 건강한 몸으로 건강한 영혼을 바라는 경우보다 건강하지 못한 몸 때문에도 건강한 영혼을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아기의 꽉 쥔 손이 경이롭다. 맨들거리는 대청마루에 앉으면 숙연해지는 것이다. 노인의 짙은 주름이 삶을 관조하게 한다. 바짝 말라 부스러지는 낙엽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주신 그 생을 다하는 데 있어, 주신 이의 뜻을 바라고 구하는 일만큼 보람된 게 또 있을까?

 

산다는 게 사역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17).” 견고함이란 여러 겹의 흔들림이 포개지고 포개져서 하나를 이룰 때이다. 나는 얼마나 수시로 의심하고 갈등하고 주저하고 의기소침하며 외로워하다 실의에 빠져 이 길이 맞나? 재차 묻기도 하면서, 그러는 나 때문에 못 살겠다. 의연하여서 오직 주만 바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이와 같은 나의 바람은 포개지고 포개져서 견고한 의뢰가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렇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밤새 피가 퍼붓고 잠깐씩 잠이 깰 때면 비 때문에 아이들이 교회에 못 오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신기했다. 가끔은 내가 신기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이처럼 할 말도 없는 묵상 글을 쓰면서 해도 해도 할 말이 이어지는 데 놀란다. 나는 무엇을 쓸까? 미리 넘겨짚지 않는다. 때론 막연하여서 마음이 멈춘 성경구절을 두고 내내 눈만 슴벅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말씀이 말을 하게 하신다?

 

나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공연히 묘술을 부릴 생각은 없다. 모르겠는데 뭘. 답답하고 화가 나는데 뭘. 주께서 나의 둔탁함을 아신다. 나의 모난 부분은 닳고 닳아서 맨들거리기까지 숱한 이야기를 되풀이 한다. 같은 것 같으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우연히 이루어지는 성령의 필연적인 주관하심을 사모한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우연인데 성령께는 오랜 시간 기다려온 것이고, 그 하나를 위해 온갖 겹의 이야기와 이야기가 중첩되게 하시는 것이다. 내 이야기 하나를 위해 너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가 한데 모인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사 26:17).” 나는 다시 신경안정제를 먹는다. 지질하여 못났으나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18).” 나의 맹랑함은 더욱 주를 바랄 따름이다. 아니고는 살 수가 없어서 말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4).” 어떠하든 여호와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2).”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4: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