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노래를 부를지어다

전봉석 2017. 7. 17. 07:16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이사야 27:2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걱정이 아니라 안도감으로 느껴지는 데 감사한다. 늘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의 은총을 느낌이 아닌 실제의 삶 가운데서 체험하며 사는 일은 복되다. 공연히 나 때문에 다들 힘든 게 아닌가, 생각할 때면 사탄은 틈새를 노려 열등감으로 휘어 감는다. 그럴 거 없다.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게 복이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게 특권이다.

 

주님은 주의 백성을 포도원을 가꾸시고 돌보시듯 한다. 함락되고 실패하여 포로로 끌려가고 더는 희망이 없을 것 같지만 주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궁극적으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모든 게 회복될 날이 올 것이다(1-8). 그러는 동안 묵묵히 주를 바라는 일,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그게 복인 것을.

 

아이들이 오고, 전혀 기대도 하지 않던 녀석이 뜬금없이 오고. 그러는 데 있어 주의 인도하심을 확신하였다. 기도하면서 곧 엄마도 같이 오자 하자. 아이들에게 말했다. 두 아이의 공통점은 다녔었다는 것이다.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회복하시려고 아이들을 먼저 보내시는 것이구나, 생각하였다.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사 27:2).”

 

그러는 동안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기를. 이웃하고 있는 사무실이나 곁을 주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낼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우리 가족은 날마다 기도한다. 이슬 같이, 있는 듯 없는 듯 스미고 스며 주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 14:5).” 나의 하나님은 그러하시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나를 부르신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11-12).” 대체 뭘 보고 이런 희망을 품는 것일까? 나는 강하게 설교하였다. 우리의 일은 사는 것이다. 생명을 주신 이께 충성을 다하는 일은 열심을 다해 사는 일. 그 일은 하늘을 우러러 양 팔을 벌리고 찬양하는 수목의 푸름과 같아서, 그 지경이 어떠하든지 주께 생을 다하는 것. 이때 그 힘은 믿음이었다. 믿음은 믿어지는 걸 믿는 게 아니다. 믿어지지 않으니까 믿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 3).” 어떻게 이런 말을 믿을 수 있는지 나는 그 원리를 알지 못한다. 믿어지는 일에 대하여는 은혜라. 우리에게 두신 소망도 그와 같아서 예상할 수 없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에 대해 우리는 소망한다. 아이 둘이 이제 두 번째 예배에 왔을 뿐인데 나는 아이엄마들을 생각하였다. 어디서 길을 잃은 것일까? 다음에는 엄마도 같이 오자. 나의 말은 뜬금없고 거침없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어서 말도 안 된다. 사랑할 수 있는 걸 사랑하는 게 무슨 사랑이겠나. 어떻게 이런 와중에 사랑할 수 있지? 싶은 걸 사랑하게 되는 게 사랑이었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그리하여 무엇을 예상하고 계획을 세워 이뤄가는 게 주의 일이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를 사랑하고 믿고 소망하는 게 주의 일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그런 의미였구나. 말씀을 전하면서 말씀을 깨달았다. 아이를 대하면서 주의 사랑을 느끼었고, 말도 안 되는 형편과 사정에서 주가 더하시는 소망을 갖는 거였다. 그래 맞다. 완전한 거지로 사는 일.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로 살아드리는 일은 묵묵히 주의 도우심으로만 살아가는 것이다.

 

아내와 딸애가 오후께 처가에 갔다. 혼자 교회에 있다 들어왔다. 마음은 저 혼자 씰룩거렸다. 우리 전씨 가족들이 수목원에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나만 이게 뭔가, 싶어서 우울하기도 하였다. 숨이 가빠지면 안정제를 먹었다. 다 늦게 아내가 돌아와, 오빠네는… 하면서 이것저것 있는 걸 이야기하며 부러워하였다. 저들도 둘째 아들만 데리고 4박5일로 여행을 갔다. 상대적으로 처지가 처량하고 딱한데 그럴 거 없다. 나의 궁색함과 궁싯거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스스로 헤쳐 나갈 문제가 아니다.

 

주가 아시나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기도와 찬송이 되어,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시 37:18).” 두신 날을 운운하기보다 그러하기까지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이것이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었다. 새삼, 이는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이어서 주께만 의뢰한다.

 

예배를 마치고 어린아이들과 색종이를 접고 스티커를 붙이면서 놀아주는 일. 새삼 어른 성도가 와야 하는데, 하던 누구의 염려가 기우였음을 생각하였다. 나는 기도하기를 이 아이들이 어느 훗날 주를 바라고 구하는 데 있어 오늘의 기억이 큰 힘이 될 수 있다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주랑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의 네 규빗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으며(왕상 7:19).” 주께서는 그것을 들어 영광을 취하신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아 2:1).” 이에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2).” 가시나무 가운데의 삶에서 주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짙어진다.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듯 대수롭지 않은 인생이겠으나,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나의 주님이 그러하셨다면 나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라시는 게 아닐까?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으나, 그렇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리하여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유 1:2).” 날 위해 기도하신다. 공연히 우울하였다가도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더니,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더하시는 거였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롯이 여호와로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삶으로 살아서 주가 주신 생을 다하는 일. 이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먼저는 믿음 위에 서야 한다. 다음은 성령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 그러는 동안 자신을 지키면서 말이다. 영생에 이르도록 주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는 일,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22).” 도리어 곁에 두시는 이들을 내가 긍휼히 여기기를 바라시는 거였다. 내 코가 석 잔데, 하고 입을 삐쭉 내밀하다가 문득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3-14).” 나는 이제 함께 가는 자이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서도 주께서 나를 보시게 내 얼굴을 주께 향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목소리를 주께 들리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이들이 돌아가고 아내와 딸애도 처가에 다니러 가고, 혼자 꿀꿀하였다가 그 마음이 생각처럼 무겁지 않아서 놀라웠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내가 복이 많다. 하는 것 없이 모두에게 짐이 되는가, 싶어 마음이 까부라질 땐 천근만근이면서도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주가 나를 보심에 대하여 절절하니 느낄 수 있다. 주가 하신다.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4-5).” 내 안에 이는 찔레와 가시와도 싸우신다. 나로 하여금 주의 힘을 의지하고 주와 화목할 수 있도록 하신다. 고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그것이 나로다. 나이어야 하기를.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