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전봉석 2017. 7. 19. 07:22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사야 29:15-16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14-15

 

 

 

누가 그럴 줄 알았나.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게 사람이라. 늘 건강하다고 여겼던 이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지를 못 쓸 뻔하였다. 살짝 왔다갔다고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에서 만나 그간 사정을 들려주어 알았다. 나더러도 건강 잘 돌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게. 그런 게 몸으로 느껴지고 자주 눈에 띄는 나이가 되었다. 밤사이 안녕이라는 어느 노인의 말이 새삼 귀하게 들렸다.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게 지혜라는 어느 현자의 말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것인데 나는 종종 저들을 부러워하곤 하는 것이어서 어리석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곧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대하여 뭐라 할 게 뭐 있겠나만, 주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인 양 구는 게 어리석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더 갖고 싶고 좋은 걸 누리고 싶고 많은 것으로 호의호식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아니 그렇겠나만, 주신 데 따른 감사가 신앙의 기본이겠다. 아프면 아픈 대로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것도 다 주의 섭리로 여겨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믿음이었다.

 

그러니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나? 물론 섬김을 결단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 20:22).” 하긴, 이 또한 신비라. 얘가 왜 오나? 싶을 정도로 그냥 오는 경우는 마치 제자들이 처음 예수의 부르심에 응하여 따른 것과 같다. 어떤 매력, 이끌림에 의한 그와 같은 일이 신비하다. 우리 안에 어떤 성질의 유전인자가 따로 있어서 누군 끌림을 당하고 누군 전혀 끌림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보면 오겠거니, 여겼던 아이는 그저 싱겁게 끝난다. 그런데 얘가 왜 올까? 싶은 아이가 그리 다가오고 이끌리고 함께 가는 것이다. 기껏 공들여 이제 좀 됐겠다 싶으면 영락없이 뻐그러지고, 이게 되려나 싶어서 큰 기대도 없이 굴었던 경우인데 함께함이 이상할 정도이다.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저들은 무작정 따랐다. 그런 자생력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22).” 주님은 강요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저가 예수를 배신하는 자리에까지 놓아두셨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 귀하긴 한데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거기까지가 사람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모든 게 불완전하고 불분명한 것이다. 그런 뒤 저의 고백은 아름답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본이다. 그리 살라는 게 아니라 그리 살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주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게 산상수훈의 교훈이었다. 그런 자는 심령이 가난할 수밖에 없고 애통할 수밖에 없음으로 온유하였다. 그렇겠구나. 내가 할 수 있습니다, 할 때보다 어리석은 때도 없겠구나. 단지 외적 부르심은 사람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만 궁극적인 내적 부르심 앞에 엎드러질 수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이겠다. 아니, 그건 임의로 그리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셔야 할 거였다.

 

동생이 네오 스마트팬인가, 하는 걸 보내주었다. 책을 읽으며 받아 적고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라, 어디에 기껏 다 적어두었다가 흘리거나 버려지는 게 아쉬웠는데 잘 됐다. 아버지가 숯 침대를 싸게 구할 수 있게 됐다면서 하나를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였다. 출출하니 오후께 주전부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옆 사무실에서 복숭아와 도넛을 몇 개 가져다주었다. 이런 식의 나열이 너무 단순하긴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가슴이 답답하고 왜 뜬금없이 숨을 쉬기 힘든가, 두려웠는데 신경안정제를 먹으면 진정이 되었다. 공황이 어떤 불안이 나를 엄습하려는가, 나는 알 수 없었다. 검사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심리적인 요인이겠다 싶다. 조금은 우울하고 또 괴롭기도 하다. 이런 식의 적용이 너무 유아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다른 궁리를 못하게 하시려고, 오직 말씀만 붙들고 앉았으면 주가 행하시는 걸 보게 하시려고! 아이 하나가 글방 때문에 온단다. 당장 오늘부터 새로 오는 애는… 그런 소문을 들었다.

 

정말이지 나는 하는 게 없는데. 그저 쩔쩔매면서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 허둥지둥할 뿐이데.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한 애가 빠졌다. 아무리 해도 안 되더니 기어이 그리 됐다. 그런데 빠지기 무섭게 다른 아이가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왔다. 우리가 나서서 홍보하고 전도하고, 권하고 이끌어서 그리 된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나님이 하신다. 우린 다만 찬양할 따름이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45:4).” 내가 분위기를 고조시켜 무얼 연출할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다른 뭐 더 좋은 걸 바라는가? 그러므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하는 오늘 시인의 고백이 진귀하다. 이에 따른 이사야의 경고에 주춤, 나를 돌아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두려워할 줄 모르는 영혼이 가장 불쌍하다.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일련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너무 비일비재하지 않나. 증거가 나오고 정황이 뚜렷한데도 모른다, 아니다, 그런 일 없다, 하고 다 잡아 떼는 것이.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이는 마치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무모함이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사 29:15-16).

 

그러므로 나는 기도한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나를 이끄시는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을 말이다. 주가 아니시면 나의 기쁨이 나를 경거망동하게 할 것이고, 주가 아니시면 나의 근심이 나를 쥐고 흔들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것이다.

 

누구를 뭐라 탓하기보다 그것으로 나를 돌아보게 하시고, 잘잘못을 가려 누구를 비난하고 비판하기보다 나를 주 앞에 온전히 세워가게 하시기를. 때마다 나를 돌보시는 주님.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시 17:2).” 나는 못합니다. 늘 쓰러져 넘어지기 일쑤고, 내 안에 드는 불안과 초조는 나의 목을 조이며 언제 어디서든 원망과 우울과 좌절을 몰고 옵니다. 성령이 아니시면 나는 지금, 이러고 있을 수도 없음을.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곧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시 17:7).” 주가 아니시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8-9).” 그리하여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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