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이사야 31:1, 9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편 19:12
오전에 글방으로 올라가 노트에 적었다.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삶.>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내가 의로울 수 있는 건 의로운 행위와 의로운 마음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내 안에 의로우신 이를 모심이겠다. 저가 내 안에 계심으로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그로 인하여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이었다. 나의 삶에 본을 보이시는 주님.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그리하여 주의 의를 사모하게 하심인데 이는 주를 모시고 주의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소망이었다. 나는 하는 게 없는데… 하고 말하자 누나는 ‘자리를 지키는 그 자체가 순종’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여운이 오래 남는 정의였다. 자리를 지키는 게 순종이라…! 그러고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연 이 자리가 주를 바라고 구하는 자리인가. 생각이 많아졌다.
오늘 말씀은 그런 내게 일갈하신다. 뭘 어떻게 해보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 궁리 저 궁리,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나름 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여러 노력을 서슴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늘 비일비재한 우리의 모색이 그러했음을 인정하였다(사 31:1).
그리하여 기껏 의지하고 붙들었던 게 무산되고,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나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던 게 뻘쭘하게 됐다.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기치, 어떤 목적을 내세워 나름 표지로 삼았던 사람과 목적이 너무 허술하였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막연하게 그럴 것이라는 게 아니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그 자리가 분명하고 명칭이 뚜렷한 것이다(9). 곧 자리를 지키는 게 순종이라는 말의 의미가 도드라진다.
아들 녀석이 무슨 국제기구회의에서 가이드 알바를 신청했다며 기도를 부탁했다. 나는 제일 기준이 주일성수임을 강조했다. 주일을 어겨야 하는 일이면 대통령도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그저 일요일에 교회를 갔냐 안 갔냐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십일조를 교회에 내야하는 게 신약시대에 맞나 안 맞냐를 따지는 꼴이랑 같다. 그래서 얼마를 한들! 나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기를 바라였다.
우리가 중생한다는 건 그와 같은 마음, 그리스도의 영을 내 안에 넣어주시는 것이겠다. 뭘 해도 어떠하든 그리 여겨지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나의 성향과 기질에서 건져주심으로 주의 성향이 내 것이 되는 일이다. 그러할 때 오늘을 사는 일이 지옥 같았던 게 언제부턴가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고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그처럼 사랑하시는 까닭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그 증거가 주일에 대하여 또한 주께 드려지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 기준이 달라지는 일이다.
가령 딸애가 이달에 선교단체를 그만두게 된다. 한데 무슨 일처리가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다음 후임이 정해지고 저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일이 다음 달 보름까지는 해줘야 하는 모양이다. 거기다 다음 기수의 훈련생들 수업인 토요일에 두어 번 출근을 해서 도와달라고 했다나. 처음에 뭐 이런,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돈을 더 준대? 하는 마음도 생겼다. 골이 나는 것이다. 그러다 그러는 과정에서 또 주의 어떤 의도가 있으시겠지. 남들은 무보수로 와서 봉사도 한다는데 싶은 마음이 들면서, 섬기는 마음으로 하자고 일러주었다.
약삭빠르면 안 된다. 계산이 앞서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성경의 가르치심이 아니다. 오히려 어리숙해져라. 오 리를 가자하면 십 리를 가줘라.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1).” 내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도 줘라.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0).”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지만, 그래서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다. 주가 아니시면 누가 이 마음을 알까, 싶은 애통하는 자가 되는 길이다.
난 그런 게 척척 잘 이루어져서 이런 소릴 하는가. 실은 누구보다 그러지 못하고 그러기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이때 주를 보고 하는 게 주의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돈돈거리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고 운신의 폭이 늘 제한될 수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따로 있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그럴 수 있는 게 내 안에 계시는 주의 영이 아니시겠나.
주님은 사랑 위에 사역을 맡기신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맡기시는 것이다. 아!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7).”
주를 사랑한다는 건 짜증나는 일이다. 주님만 사랑하며 황홀경에 젖아 살고 싶은데, 그러니 저 일을 하라 하신다. 이 사람을 맡기신다. 하필, 이런 아이다. 계속 신경을 긁듯이 아이는 칭얼거리듯 요령을 부렸다. 그럴 거면 가! 하고 싶은데 애기를 얼레고 달래듯 도넛을 내주고 얼음물을 만들어주고 비위를 맞춰 주를 마주하는 일처럼, ‘내 양을 먹이라.’ 그래서 사랑이란 내 인격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얄미운 아이에게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상상도 못할 거야! 하고 장난처럼 말해놓고는 놀라웠다. 주님의 마음 아닌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나도 언제 그 자격이 또는 사랑스러운 모양이 있어서 주의 사랑을 덧입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괜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 죽어 마땅한 위인이었는데 주께서는 나를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럴 거면 가! 하고 내보내지 않으셨다. ‘내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주님은 날 위해 죽으셨다.
그 사랑,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나의 믿음이 어릴 때는 내가 해보겠다고 나서지만 주를 더욱 사랑하면 할수록 주가 데려가시는 자리인지를 염두에 두는 일이다.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나의 요구를 다짐을 바람을 옮겨놓는 일이다. 옮겨놓으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일이다. 그 사랑,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3).”
예수님의 마음에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을 바라시는 거였다.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 어찌 저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래서 두렵지 않을 수 있겠으며 행여 질투하여 미끄러질 뻔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 그러니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종일토록 주의 성전에서 나를 보호하시며 저들의 종말을 깨닫게 하심이 아니었나.
몹시도 무더웠다. 아버지가 숯 침대를 사주셨다. 내가 사드려도 모자랄 판에, 면목이 없었으나 그게 또 아버지의 마음이겠구나, 생각하였다. 가정예배를 드리다 말고 아내에게 고백하였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그렇다면 억장이 무너지겠다. 그게 아버지 마음이겠다.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마움과 송구함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사람 참 미련하다. 무엇으로 이를 갚을까. 내 자리를 지키는 것. 주께 순종함으로 이 모두는 하나님이 그리 여겨주심이었다. 주가 나를 사랑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의 물으심 앞에 나는 주를 사랑합니다. 나의 대답 위에 주의 일을 놓으신다. 내 양을 먹이라. 이 아이 하나를 주의 이름으로 마주하는 일. 내 성치 않은 몸뚱이 하나를 주의 사랑으로 건사하는 일. 저 말도 안 되는 부당함 앞에 주의 마음으로 섬기는 일. 감당하지 않는 자 깨닫지도 못할지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오직 주님만 우러르며 살 수 있기를. 곧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나는 나를 감당할 수 없어서. 내가 제일 어려운 문제여서. 그러므로 주 앞에 고하기를,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3).” 주가 하셔야 할 수 있음을.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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