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이사야 28:5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편 16:1
괜히 속상하고 우울하고 힘들었다. 남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을 일이 왜 내겐 이처럼 고달프기만 한지. 몸뚱이를 건사하는 일도,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도, 사사로워서 그저 훠이훠이 넘어가도 될 일인데 그게 그처럼 녹록치가 않은 것이다.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 일에 지치는 하루였다. 괜히 말이다. 새삼스러울 게 없는데, 괜히 힘에 부쳐 쩔쩔맸다. 견딘다는 것, 감히 그러고 있으면서 이와 같은 말씀에 대입한다는 게 면구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말씀이 그저 말씀으로 있으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는 다시 눈을 부릅뜨고 내 것으로 읽혀질 때까지 되풀이하였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고후 6:4-5).”
환난은 내 안에 이는 근심이 아닌가. 근심은 해결해야 하는 일을 두고 있는 마음일 테고.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쩔쩔매는 게 고난이 아니겠나. 잃는 것에 대하여 당황스러워하는 마음이다. 궁핍이라 하면 자유가 억제된 것이다. 매 맞음은 누가 날 때리는 게 아니라 내가 날 괴롭히는 일이다. 나는 갇혔다. 내 안에서 난동이 인다. 하루가 너무 수고롭다. 잠이 달지 않고 먹은 게 소화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겪는 일인가 말이다.
뚱딴지같지만 나는 모든 글이 나를 향하신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주옥같으면 그림에 떡일 뿐이다. 아무리 좋은들 뭐하나. 나는 하나님께 투덜거렸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자존심 상하고 속상하다. 송구하고 민망하다. 그저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을 일을 나는 애써야 하고 또 수고로워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나? 생각하다 사는 데 있어 사느라 그러는 것인데 그럼 살아가게 하신 이와 어찌 상관이 없겠나. 그리하여 나의 많이 견디는 일에 대하여 나는 하나님께 하소연해도 된다. 툴툴거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일을 나 혼자 곤두세워 예를 갖추는 게 거룩이지 않을까? 거룩은 저항할 때 돋보인다. 평상시엔 잘 표가 나지 않는다. 다 똑같아 보이는 돌도 옥석을 가리는 이의 눈에는 다른 것이다. 공연히 심통 난 아이처럼 구는 내게 ‘하나님은 전부를 거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콧등이 시큰했다. 나 하나를 바로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셨다. 온 신경을 내게 집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아! 누가 붙들어줄 수 있을까?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사 28:5).” 남은 자란 주께서 ‘남기신 이’지만 그리 여겨 살 때의 삶이란 게 어떠하였겠나. 이방 민족에 대해서는 말할 것 없고 북 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그 숱한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돌아서는 데서 ‘남은 자’의 생활을 상상하여보았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이고 이미 다들 그러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저 혼자 낑낑거리면서 애쓰고 속 태웠을 것 아닌가.
그놈의 술.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7-8).” 여전히 한 잔 정도야 어때? 하는 따위의 안위가 옆 걸음질 치게 하고 비틀거리게 하며, 엉뚱하게 느끼고 분별없이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게 하는 것 아닌가. 더러운 게 가득하고 내 안에 깨끗한 곳이 없게 만드는 주범이다.
이런 소릴 하는 게 이젠 고리타분한 일이 되었다. 세상은 더 개화되어 인권은 물론이고 모든 동물의 권리도 주장하는 판이 됐으니. 그러한데 우리의 염려는 다만,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아차, 싶은 것이다. 에이, 설마! 하는 순간에 벌써 뱀이 말을 건다. 정녕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공연히 힘에 겨웠던지, 자리에 눕기 무섭게 잠이 들어버렸다. 고단한 하루다.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이런 소릴 자꾸 하는 게 민망하지만 몸도 마음도 힘에 부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어찌 이와 같은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되는지.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8-29).”
그래 맞다. 아무리 나를 밟는다 해도 나를 망가뜨리시려는 것인가. 수레바퀴에 굴려 말굽으로 밟게 하셔도 부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낱알을 싸고 있는 이 두꺼운 껍질을 벗겨내려는것이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23).”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려고, 내게 전하여 줄 말씀이 있으셔서 그랬구나. 곧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6).” 주가 나의 힘이시다.
툴툴거려 화를 내고 공연히 마음을 어지럽힌 하루였지만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16).” 나를 밟으셔서 죽이시려는 게 아니고 나를 짓누르시되 아주 으깨시려는 게 아니었다.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지나가며 주야로 지나가리니 소식을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19).” 견고한 의뢰가 있게 하시려고.
내 수고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나를 얻기 위해 주께서 포기하신 것만큼 할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하나님은 나에게 모든 걸 거셨다. 일찍 일어나 잔뜩 몸을 뒤틀며 끙끙거리는 내게 주의 위로가 크시다.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아!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3).” 그러므로 나에게 주신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고후 6:3).” 많이 견디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6-7).” 말씀을 무기삼아 깨끗함으로 오래 참고 자비함으로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견디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나를 붙드실 것이다. 이러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지만 이미 충분하였다. 다시금 주의 말씀 앞에 앉게 하시는 게 그 증거였다. 지겨워 툴툴대다가도 다시 책을 끌어당겨 읽는 걸 보면 말씀이고 말씀과 씨름하는 이의 묵상이고 설교였다. 신기하지. 가끔 나는 나보다 더 신비한 증거를 알지 못한다. 누가 내게 하나님이 어디 있냐? 물으면 날 보면서도 그런 걸 묻나 되묻고 싶다.
그리하여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곧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10).” 신기하게도 이 말씀이 곧 나를 두고 하시는 거라는 걸 나는 확신한다.
살면서 실족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실족은 곧 저들로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준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7).” 그래서 나를 더 시달리게 하시는 것이구나. 혼자 끙끙거리는 게 남들에게 주의 이름이 조롱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 또한 나로 하여금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그것으로 진리의 능력의 말씀을 삶에서 체험하며 살게 하시려고.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힘들고 지쳐 당장 포기하고 좌절할 것 같다가도,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9).” 때론 이보다 더 신기한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누구에게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셨는가를 늘 묵상하고 붙들게 하시려고,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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