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17. 7. 20. 07:30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사야 30:18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시편 18:29

 

 

 

어떤 어려움 앞에서 우린 누구를 의뢰할 것인가.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주를 의뢰하기보다 애굽을 먼저 의지하였다. 오늘 이사야서는 그에 따른 징계와 그럼에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오랜 기다림은 경이롭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그 사랑 앞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러므로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어쩌면 성경의 구구한 역사가 오늘 이 한 대목으로 함축되는 것은 아닐까?

 

그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정의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그러기 위해서도 기다리신다. 이는 또한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 10:13).” 정의를 실현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다윗의 기도를 읊조린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 18:29).”

 

너무 덥고 지치는 하루였다. 엄마가 아파서 계속 마음이 쓰이는데 늘 받기만 하고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신세여서 처량할 때였다. 군대에서 아이가 전화를 주었다. 안부를 묻고 다음 주일에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처량했던 마음에 금세 청량감이 드는,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이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아이의 전화 한 통이 얼음냉수 같음이 찌는 듯하여 무더위에 지쳐 있을 때 큰 위로가 되었다.

 

뜬금없이 복도 저쪽 편에 있는 사람이 안부를 물으려 왔고, 부과세 문제로 사장이 두어 번 드나들었다. 다들 이래저래 사연이 많았다. 결국 탈북민센터는 사무실을 빼기로 되었단다. 누군 뇌출혈로 아찔하였고, 그와 같은 사연마다에는 그래서 붙드는 게 각각이었다. 누군 더욱 건강을 돌보고, 누군 보험을 당부하고, 누군 어디로 낙향을 해 유유자적하기를 희망하였다. 모든 사연에는 의지하는 바가 다르구나, 생각하였다.

 

그런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말씀은 얼마나 단순한가. 내게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구하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 이게 어려운 건 온갖 사연에 막혀 미루고 제쳐두어 우선은 ‘애굽’을 의지하려하기 때문이었다.

 

아, 애굽은 상한 갈대 지팡이라.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 36:6).” 왜 그러는지 나는 모른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심리적인 요인에 대하여는 더더욱 이해할 길이 없다. 며칠 전부터 신경안정제를 다시 복용하고 있다. 엄마가 아프다는 것 때문에도 어떤 불안이 또 염려가 나를 엄습하였다. 나는 하루하루가 힘에 겹다. 왜? 하고 물으면 구구절절 할 말이 많겠으나 나도 모른다. 가정 예배를 드리며 이를 위해 기도하였다. 주를 사모하는 데 유용하게 하시기를. 애굽을 의지 않게 하시려고!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내가 얼마나 친구를 좋아하고 어디 멀리 돌아다니기를 즐겼으며 괜한 것에 마음을 두고 설레기를 바라며 연애감정 예찬론자로 살았던가. 나의 애굽은 수도 없이 많아서 그 변덕을 어르는 데도 비명이 났다. 그게 싫지 않았고, 그것으로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글이 안 써지면 연애를 해. 하는 따위의 말을 신봉했다. 감정은 저 혼자 먼 하늘을 날아다니기를 바랐다. 그런 내게 주는 이제 주만 바라기를 원하신다. 너무 힘들고 때론 지치지만 나는 나의 오늘을 축복이라 여긴다.

 

한 아이가 새로 왔다. 어린 게 앙증맞게도 예의범절이 뚜렷했다. 마음 씀이 고왔고 하는 짓이 반듯했다. 넌 교회 다니니? 하고 물었더니 성당 다녀요, 하고 대답했다. 어쩐지. 내가 아는 착한 사람들은 모두 성당에 다닌다. 내 곁에 예의 바르고 마음이 고운 사람은 모두 말이다. 좀 그런데, 약삭빠르고 되바라진 사람은 대체로 교회를 다닌다. 자기 멋에 겨워 입만 살아 있는 사람은 대체로 말이다. 번드르르 말만 잘하는 사람들이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경우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바로 알 것 같기는 하다. 그 사랑은 우리의 됨됨이를 능가하신다. 오래 참으심은 이내 주의 강권하심으로 주도하신다. 알아서 착하게 사는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이 없거나 또는 없어도 되거나 하는 경우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내 의지로는 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자리에서이다. 내가 할 수 있을 땐, 어쩌면 그 의뢰는 의뢰가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건,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안 믿어지는 걸 믿는 게 믿음이지 믿어지는 것을 뭐 하러 믿나. 그게 어려워서 기어이 찾는 것이 애굽의 도움이거나 주를 바람이거나. 자기 의지이거나 철저히 주께 복종이거나. 그 약속,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성령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착하게 살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게 아니다.

 

더 높고 더 깊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살아서 삶으로 주의 증인이 되는 게 우리의 사명이었다.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49).” 딸애가 사역지를 구한다며 기도를 부탁하였다.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주신 이에게 감사를.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공명심이거나 괜한 기대가 아니기를 당부하였다. 내가 뭘 해라, 하지마라, 할 게 아닌 것 같아 더는 말을 아꼈다.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30).” 우린 다만 말씀 뒤에 숨는다. 주가 나의 방패이시다. 건강도 영혼도 보람도 일이 되어지는 과정도 모두 주의 것이라. 오직 나의 삶은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아멘, 하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만 예가 되니 아니라 할 게 없다. 아멘으로 받으면 버려질 게 없는 것이다. 나의 지질하고 못난 기질과 성품까지도 말이다. 왜 또 불안해 해? 하고 딸애가 물었다. 그런 거 없는데, 하면서 나는 갸웃거리며 안정제를 삼켰다. 머물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기다리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이는 모두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이다. 성령이 나를 주도하시게 하는 게 신앙이었다. 내가 어쩌나, 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그것으로 고달픈 건 자신뿐이라.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시기를 기다리라. 머물라. 성경의 원리는 그러하였다. 구하라. 내게 오라. 나를 따르라. 여기에 덕지덕지 사연을 더하고 이런저런 구구한 어쩔 수 없음을 덧붙이고는 혼자 쩔쩔맨다. 그래놓고는 주를 원망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겠으나 성령을 주옵소서. 저 아이에게, 이 교회에, 건물에, 내 마음에, 이 일에, 지금 가는 길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성령을 구한다. 주가 아니시면 저 애가 여길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여기 교회를 두신 덴 성령이 내주임재하시기 위함인데 이곳에 오시지 않으면 이걸 어따 쓰겠나. 나는 억지를 부리는 아이처럼 성령을 바랐다. 그리하여 그리하여서 내가 구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깨닫는 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 미련하고 아둔한 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늘 마음을 저 혼자 술렁거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서 쩔쩔매고 공연히 주님 앞에 입을 삐쭉거리기 일쑤인 이 못난 사람이지만,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이 고백이 날마다 매순간에 드려지는 것이기를. 이것만으로 충분하였으면.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28).”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모두 버려두고서라도 오직 주만이,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31).”

 

그러므로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