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이사야 32:15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시편 20:6
너무 더워 몇 번을 잠을 설치다 깼다. 자다 말고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 낮에 읽은 단테의 <신곡>을 떠올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옥이 무섭다. 아비규환열사지옥은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 지옥문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고 단테는 상상하였다.
나를 통하여 통곡의 거리로
나를 통하여 영원의 벌을
나를 통하여,
죄 많은 지옥의 백성이 모이는 거리에 이르리니
그 무엇도 내 앞에 없고
그 무엇도 내 뒤에 없으니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문을 지나는 자여!
‘나를 통하여’ 하는 반복어구가 마음을 짓눌렀다. 지옥문을 지칭하면서 함의적으로 자아실현의 결과를 일컫는 말 같았다. 나를 통하여, 내 문을 지나 지옥에 이르리니. 자아중심적인 문을 일컫는 말이 아니겠나, 생각하였다. 비성경적인 요소가 여럿 있으나 가늠하여 짐작할 수 있는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러므로 오전에 읽은 민수기서의 약속이 더욱 든든하였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 주가 원하시는 일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기를.
여름은 더워 죽겠고 겨울은 추워 죽겠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바른 살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귀하였다. 에어컨이 시원찮아 수업 중에도 문을 열고 선풍기로 버텼다. 그래서 중학교 아이들 수업시간을 방학에는 오전 열 시로 옮겼다. 방학 동안에 늦잠을 자야한다고 투덜거리는 아이들의 투정을 묵살했다. 이겨내는 자만이 오라. 어떠한가, 두고 보고 싶었다. 다들 해보겠다고 하였으니 기대해볼밖에. 일찍 일어나고 오후에 더울 땐 시원하게 도서관에 가라고 일렀다.
다들 겪는 인생에서 누군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간다. 어릴 때 내가 지옥을 무서워하자 주일학교 선생은 내게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정작 지옥에 갈 사람은 안 믿는다는 것인데, 것도 일리가 있었다. 지옥을 믿는다면 천국을 사모함이고, 지옥과 천국을 구별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 텐데, 나는 이를 옳게 여긴다. 두려워할 줄 안다는 건 축복이다.
오늘 본문은 기어이 주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준다.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돌아오면 받아주신다. 이 간단한 원리를 한사코 외면하는 것은 자아실현 때문이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주의 백성에 대하여는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사 32:15).” 결론은 주의 영이다.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안 된다.
내가 주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주의 영을 나에게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내가 주를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주의 영이 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심이다. 주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 안에 주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령을 구하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이를 내게 알게 하신 이가 따로 계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그러니 지금 내가 아는 이 앎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늘 나는 투덜거리며 하나님께 입을 삐쭉거리기 일쑤지만 주님은 결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놓아두고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명료한 진리 앞에서도 우리 사람은 얼마나 끔찍한지 모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은 메마른 나무가 되어 하릴없이 영원을 살아야 하는 지옥의 제 칠 영역이 소름끼쳤다. 신의 뜻을 거스른 자, 자연의 이치를 배반한 자, 쾌락에 탐닉한 자들이 한 데 모여 사는 아비규환의 땅이다.
자전거를 묶어두는 곳에 하나는 분식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인형뽑기집이 있다. 인형뽑기집은 연일 35도가 넘는 날씨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순간 냉기가 느껴져 뭔가 했더니 그래서였다. 같은 평수의 좁아터진 주방에서는 아주머니 셋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분식집과는 대조적이었다. 저들 속사정이야 알 길 없지만, 돈 버는 방식에서 지옥의 종류를 엿본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주가 바라시는 삶을 지향할 때 세상은 결코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사는 데 쉬우면 죽어서 어렵다. 쉽게 돈을 버는 길은 죄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용이하다. 내가 내 의지로 살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나를 통하여’는 지옥문밖에 없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나의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이를 사랑함이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였다. 수영장 물이 다 뜨듯하게 데워졌을 정도니까. 거리는 이글거렸고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실내로 들어갔다. 나는 자전거 페달을 굴려 수영장을 가고 오면서 지옥을 연상했다.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 삶을 그대로 산다. 아니, 마치 식탐을 주체할 수 없어 입이 셋 달린 케르베로스를 닮았다. 알고 보니 그 인형뽑기집 주인은 같은 건물에 하나 더, 저쪽 건너 건물에도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벽면에는 민망한 포즈를 취한 여성이 누워 맛사지를 받는 그림이 여럿 붙어있다. 같은 업종의 영업점이 난립해 있는 것이다. 코인 노래방이 청소년을 유혹한다. 천 원에 세 곡을 부를 수 있다고 광고한다. 주점마다 베너 광고판을 여러 개 세워 손님을 끈다. 성인주점은 어디서나 성업중이다. 머리는 소, 하체는 사람인 미노티우로스가 미궁에 갇혔다. 다들 산다고 나름 열심히 사는데 점점 헤어 나올 수 없는 길이다. 결국, ‘자기 계획을 여호와께 숨기는 자는 화있을진저.’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 29:15).” 답답한 노릇이다. 성매매근절을 운운하지만 가장 돈 벌기 쉬운 것이 그것이다. ‘어두운 데서 행하며 누가 보랴. 누가 알랴.’ 한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이는 마치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6).”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건 돈벌이에서부터 달라진다. 사는 방식이 바뀌고 취하는 노력이 다르다. 주를 바라는 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거듭남으로 주의 성품을 덧입는다는 건 막연한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의 가치다. 눈 먼 돈이란 없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게 아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순종한다는 건 손해를 보더라고 옳은 길,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바 그 쓰임에 합당한 삶을 사는 일이다. 그러니 얼마나 바보 같은가. 묵묵하다는 건 멍청한 짓이다. 건너와 종종 들려주는 사장의 말은 현란하다. 치고 빠져야 할 때를 알면 돈을 모은다는 것이다. 그러다 꼭 끝물에 올라타서 망하는 것이라고. 인형뽑기도 길어야 일이 년이라면서 여러 개의 점포를 낸 아래 층 업주의 선견지명을 칭찬하였다. 땡길 때 와짝 당겨야 한다는 소리였다.
안중에 지옥은 없다. 하나님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막연한 두려움은 한 잔 술이면 족한 것이다. 뭐라 한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나를 통하여는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을까.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에나 딱 어울릴 것이다. ‘그 무엇도 내 앞에 없고/ 그 무엇도 내 뒤에 없으니’ 그저 나 하나로 만족하는 삶에 대하여는 케르베로스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열린 세 개의 입에서는 미처 삼키지 못한 음식물이 질질 흘러나온다.
아!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시 20:6).” 곧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6-17).” 주만 바라며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나는 가진 게 없어 구차하기 이를 데 없이 빈궁하다 해도 이와 같은 주의 말씀 앞에서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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