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사야 34:16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편 22:10
하필, 예배에 나올 수 있는 시간에 억수로 비가 퍼부었다. 초등부 아이들은 부모가 나가지 못하게 한다고 알려왔고 다 큰 아이들도 날씨 탓으로 오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침수된 길을 돌아 다 늦어서야 도착하실 수 있었다. 힘에 겨워하는 부모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의로울 게 없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셨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22:4-5).” 어떤 유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해서 못 오는 경우가 있고 그럼에도 오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못할 수 있고 그런데도 하는 이가 있다. 그 차이는 미미한 것 같으나, 신앙의 발판이란 날이 좋고 평범할 때야 무슨 차이가 날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5).” 살아서 이 땅의 일로 가름될 게 아닌 것이다.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 데려감을 당하고 누구는 보려둠을 당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눅 17:34).” 누가 알았겠나? 설마 하는 순간이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5).” 그러니 성경은 일러,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우리를 독려하시는 거였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 그래도 되는 건 아니다. 다들 그런다고 해서 너는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노구(老軀)를 끌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러 오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극이 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그 사랑이 얼마나 잔인한가. 자신을 다 내어주기까지 하는 것인데, 나는 종종 낭만적인 것만 꿈꾸는 모양이다. 예배 마치고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서울에 있는 모 교회 오후예배 인도를 위해 출발하는 모습이 든든하였다.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그 사랑을 알까. 받은 자가 또한 누린다. 늘 골골하는 내가 송구하였다.
반석의 원리는 간단하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공들이는 까닭은 당장을 위한 게 아니다. 비가 오니까 그럴 수 있고, 날씨가 좋으니까 또 그럴 수 있고, 누가 무슨 일에 처했으니까 그럴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과 여건을 주가 모르실 리 없는데 ‘그럼에도’의 것은 주께 받은 만큼의 증표다. 그 정도면 그저 그 정도인 것이다. 아무리 금덩어리가 앞에 놓였다 해도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그 가치를 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없다면야 그게 돌덩어리와 다를 게 뭐 있나.
그래서 말씀은 말씀뿐인 것을 그처럼 강조하시는구나.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곧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거룩을 향하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를 위해 모든 걸 두셨다.
그 증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 이를 위해 남은여생도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말씀 증거를 위해 뛰는 삶.
이에 제일 목적은 주와 화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하나님과 화목한 증거는 말씀을 어찌 여기느냐에 따라 가늠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이를 위해 모든 걸 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21).”
모든 ‘그럼에도’ 말씀 붙들고, 말씀 증거를 위해 기력을 다하는 일에 있어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하심이었다. 나에겐 그리 읽혔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우리가 이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공동묘지 앞에서의 모든 사연은 안 됐고 다 이해가 된다. 그런데 누가 이해를 받아 구원에 이르나. 얄팍한 우리의 이해가 자신을 너그럽게 내보려둠으로 안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지’ 하는 정도로 토닥거리고 말 일이 아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이는 경고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어지간하면 같이 <예수는 역사다>를 보러가려고 했는데, 가뜩이나 찐득거리는 날씨 탓에도 몸이 여의치 않았다. 마음이 여느 날보다 어려웠나, 도로 안정제를 때마다 먹어야 했다. 숨이 가빠서 불안한 것인지, 불안해서 숨이 가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주님은 서둘지 않으신다. 얼마든지 시간을 두신다. 오히려 돌려보내 생각해보게 하신다(눅 9:57-62). 그리곤 정리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이처럼 마음이 번잡스러워서야 어디. 좀 의연해도 될 일인데 왜 이렇게 조바심치는지 모르겠다. 한데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할 수 없어서, 나는 할 수 없다는 게 힘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도움을 바란다. 어쩌면 내가 그러기까지 주는 그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게 아닐까. 우리가 더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기까지. 오롯이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그게 아니면 모든 게 허사여서. 성경의 기본 원리는 그것이었다. 그리할 때 영접하는 마음은 순수하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러할 때 아무런 소득도 가치도 내게 자랑도 될 게 없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마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 어떤 기대를 알고 성과를 바라며 그럴 것이다, 하고 시작하는 일은 이미 불순하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일에서도 다르지 않다.
도우심은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일 테고, 그럴 때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어서 위험하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하는 일, 그래서 ‘~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하는 식의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그럴 리 없다. 오히려 그 모든 ‘때문에’를 내려놓기까지 하나님은 없으신 듯 있으시다. 있으신 듯 없으시다. 그래서 나는 종종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이게 맞나? 정말 이 길이 맞나? 싶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들은 다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왜 나만 이렇지? 싶어서. 틀렸다. 그럴 리 없다.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 22:10).” 고로 내 의지나 선택의 문제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관심은 내게 쏠리셨다. 오늘에 이르러 사람들이,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7-8).” 늘 골골하는 사람이라 민망하다가도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6).” 이를 인정하기까지 주가 내버려두시는 걸 느낀다.
그리하여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9).” 주를, 주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어디가 아프다가 또는 불안에 싸여 허덕거리면서 생각하였다. 결론은 하나님이다. 아침에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히시곤 이와 같은 생각으로 감격스럽게 하시는 것도 분명히 나의 자의적인 노력에 의한 게 아니었다. 그리 되게끔 하시려는 주의 오랜 기다리심과 참고 바라시는 모든 것이었다. 볼품없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으나, 아무도 모른다 해도 이슬처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 14:5).” 그리하여 지극히 평범한 데서 비범함을, 그저 범상한 데서 범상치 않은 것을 돋게 하신다. 영적으로 너덜너덜해져 거지같은 심령이 될 때까지. 그리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그렇겠구나. 그러시는 거였구나. 가슴이 답답해서, 가만히 손을 얹고 주만 생각하게 하시려고.
나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지었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시 22:11).” 나는 주를 떠나 살 수가 없음이다. 내 안에서 굉장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직 주만이,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될 줄이야! 그러므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9: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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